피에르 비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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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에 베른 정부와 피에르 비레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비레는 교회가 국가의 보호 아래 자리잡고 있지만 정치 제도로부터 독립적이기를 바랐다. 그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신앙과 품행을 사전에 검증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베른 정부는 이 통제권이 자기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교리 문답과 예전에 관해서도 이견들이 드러났다.
 
1559년 베른의 강압 통치가 끝남과 함께 비레는 상 메르 성(château Saint-Maire)에 사흘 동안 갇혔으며 목사직으로부터 면직되었다. 그는 3월 2일에 제네바로 떠났고 거기서 설교자로 활동하면서 그 해 12월 25일에 [[장 칼뱅]]과 함께 제네바 시민권을 받았다. 그는 1561년 건강 상의 이유와 남 프랑스의 교회들을 돌보기 위하여 제네바를 떠나 님(Nîmes)으로 갔으며 1562년까지 아카데미의 신학 교수직을 맡았다. 1562년에 그는 리용으로 가서 1565년까지 있었다. 1563년에 거기에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제4차 전국 시노드(Synode)를 주재하였다. 리용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는 종교개혁 진영을 약화시키고자 하였고 1565년에 비레가 추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비레는 당시 기욤 드 나쏘(Guillaume de Nassau)의 보호 아래 있던 오랑즈(Orange) 공국으로 떠났고, 1566년에 몽펄리에(또는 몽펠리에)로 갔다. 결국 프랑스로부터 추방당한 그는 잔느 달브레(Jeanne d'Albret)의 초청으로 나바르에서 그의 만년을 보내면서 오르테 아카데미(Académie d'Orthez)에서 가르쳤다. 후에 [[앙리 3세]]가 된 앙주 공은 1569년에 이단자 근절을 명분으로 삼아 베아르([[:fr:Béarn|Béarn]])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레는 가브리엘 드 몽고메리(Gabriel Ier de Montgommery)가 [[잔 달브레]] 여왕의 나라를 탈환할 때까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서 1571년 죽을 때까지 자기 직무를 수행하였다.
 
잔느 달브레는 이렇게 썼다. "이 최근의 전쟁 기간 동안과 그 이후에 내가 입은 큰 손실들 중에 첫째가는 것은 하나님이 비레씨를 다시 데려가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