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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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
[[파일:유릉 금관조복 문인석.JPG|thumb|섬네일|왼쪽|180px|유릉의 금관조복 문인석]]
[[숙종]]의 [[명릉]]은 숙종의 명으로 [[조선 정종|정종]]의 후릉의 제도에 따라 부장품의 수를 줄이고, 석물의 크기가 실물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꾸민다. 그리고 대군*옹주의 원과 왕릉에 쓰이던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을 제도화하였다. 후일 명릉은 《속오례의》〈산릉의〉의 기본 능제가 되었고, 《국조상례보편》〈산릉의〉의 기초가 되어 조선 후기 왕릉 제도의 분기점이 되었다.<ref>이호일, 위의 책, 307 ~ 308쪽.</ref>
 
[[정조]]의 아버지인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융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화려한 면이 있다. 이 때 조선 전기의 양식과 조선 후기의 양식이 조화되어 상단에는 기본의 팔각 장명등에 큰 꽃을 올린 모양의 지붕과 중단에는 화문을 새기고, 하단에는 운족을 세운 새로운 장명등의 양식이 등장하였다. 또한, 이때 문인석이 복두를 쓴 송나라 양식에서 금관조복을 입은 문인석으로 변모하였다.<ref>이호일, 위의 책, 358쪽.</ref> 이때의 양식은 후대의 왕릉에 이어지게 되었고, 특히 금관조복을 입은 문인석은 인릉과 예릉을 제외하고서는 조선황릉인 홍유릉에까지도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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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의 조선왕릉 ==
[[파일:덕안릉.jpg|thumb|180px|[[목조]]와 효공왕후의 덕안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총 40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 있는 [[제릉]]과 [[후릉 (조선)|후릉]]은 제외되었다. [[제릉]]과 [[후릉 (조선)|후릉]]은 [[개풍군]]과 [[개성직할시]]에 위치한 조선왕릉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띄고 있다. [[조선 태조|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신의왕후]]는 남편이 왕이 되기 전에 개성에서 사망하였기에 개성 근처에 묻혔던 것이고, [[조선 정종|정종]]은 [[조선 태종|정안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나서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기에 개성에 묻히게 되었다. [[제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재 분류인 보존급(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보물|보물]]급에 해당) 556호로 지정되었고, 제릉비는 보존급 1624호로 지정되었으며, [[후릉 (조선)|후릉]]은 보존급 제551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의 무덤은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제릉에는 [[건원릉]]과 유사한 6각형의 장명등이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조선왕릉을 조사할 당시 북측의 실측자료를 받아 조사하였다.
 
또한, [[제릉]]과 [[후릉]] 이외에도 [[조선 태조|태조]]의 선조들의 왕릉들은 대부분 이들이 살았던 함길도(오늘날 [[함경도]])에 있다. 태조의 4대조의 무덤들은 조선이 건국되고 난 뒤에 왕릉으로 추봉되었다. 1392년에 익조의 능호와 함께 4대조의 능호를 일괄하여 정했는데, 함경도의 조선왕릉은 같은 능침 공간에 조성되었어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과 같이 제각각 다른 능호를 사용하였다. 이 왕릉들은 모두 함경도의 함흥과 안변, 문주 등지에 있던 까닭에 통틀어서 ‘함길도 8릉’으로 불렀다.<ref>국립문화재연구소, 위의 책, 422쪽.</ref>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의 무덤이 태조를 거쳐 [[조선 세종|세종]] 대에까지 이장되어 왕릉의 형식으로 보수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함길도 8릉에 대한 현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사진도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찍은 사진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북한지역정보넷에서는 함길도 8릉 중 [[정숙왕후]]의 왕릉인 숙릉만이 등록되어 있을 뿐이고, 이마저도 북한의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않은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