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4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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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공화국 표}}
'''제4공화국'''(第四共和國)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네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이다. 유신 체제로 불리기도 하는 대통령 1인 독재 체제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끊임없는 논란과 논쟁을 낳고 있는 체제이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용하여 [[10월 17일]], 당헌법을당시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을 추구하던 [[대통령]]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정당 활동 중지, 일부 헌법의 효력 정지 등의 [[긴급조치|비상조치]]를 발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했다. [[11월 21일]] 국민 투표로 [[대한민국 헌법 제8호|유신 헌법]]을 확정하였고, [[12월 23일]]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 27일 취임했다. 이것이 10월 유신으로 이 시기를 '''유신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제4공화국 정부는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제4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독재 체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속에서 [[10·26 사건]]이 일어제는일어나 유신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 성립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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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긴급 조치권]], [[국회 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연임할 수 있었으며, 대통령 선출 제도가 [[직접 선거|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 선거|간선제]]로 바뀜으로서 행정·입법·사법의 3권이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로 1인 영구 집권 체제인 총통제(總統制)를 채택하였다.<ref name="qkrwjdgml">[http://www.516.co.kr/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ref>
 
=== ,똥정치 ===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ref name="qkrwjdgml"/> 이 헌정 체제 하에서 많은 민주화 운동과 그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다. 이 체제는 오직 대통령 [[박정희]] 1인의 [[독재]]를 위한 체제였으며, 한국의 6개 공화국 중 가장 민주주의가 무너진 헌정이었다.{{출처|날짜=201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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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8일 대한민국 제9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 [[김옥선]]은 반 유신헌법 취지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의원직 사퇴, 공민권 제한이라는 [[김옥선 파동|파동]]을 일으켰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5개월 후 치러진 [[대한민국 10대 총선|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 (1967년)|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다른 야당인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통일당 (1973)|민주통일당]]까지 더하면 득표율 격차는 8%에 이른다) 등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ref name="김정렴1">[[김정렴]]이 그가 쓴 책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언급. {{뉴스 인용|저자= 이고운 기자 |url=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6/08/23/200608230012.asp |제목= 박정희의 경제정책 18년, 생생한 증언 |날짜= 2006-8-23 |확인일자=209-5-12}}</ref>
 
[[1979년]] 10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1명이 추락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민당 당수 [[김영삼]] 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영삼은 미국을 향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가 국회 내에서 제명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979년]] [[10월 2일]]에 [[부산광역시|부산]]에서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인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이 발생하였으며, [[마산시|마산]], [[창원시|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고,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며 부항쟁부마항쟁은 진[[10월 26일|월 26일]] [[김재규]][[정승화]][[전두환]][[12·12 군사 반란|사건]][[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진압되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고, 12월 12일, 살해 장소에 함께 있었던 [[정승화]]를 [[전두환]] 등이 연행한 [[12·12 군사 반란|사건]]이 발생했다.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기구를 설립해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 ,똥 ===
 
=== 10·26 사건 ===
{{본문|10·26 사건}}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선호 (1934년)|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0월 유신|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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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삽교방조제|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당진송신소 개소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도우미로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권력간 암투에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당시에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 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E{{본문|있다.

=== 12·12 군사 반란}} ===
{{본문|12·12 군사 반란}}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 참모총장]], [[장태완]]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그리고 [[정병주]]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수전사령부 사령관]]을 연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군부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하였다.5·17 {{본문|5·17 쿠데타}}
 
=== 5·17 쿠데타 ===
{{본문|5·17 쿠데타}}
10.26 사태 이후 한국의 모든 정치 세력은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민주적인 내용이 담긴 헌법으로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오랜 1인 독재 체제를 마감하고 민주화를 기대하는 국민 여론이 높아졌다. 1980년 5월 12일 여야는 같은달 20일 국회개헌특위가 마련하는 헌법개정안을 접수하는 한편, 계엄해제안을 비롯한 정치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하였다.<ref>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13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5-13&officeId=00020&pageNo=1&printNo=18031&publishType=00020 1980년 5월 13일 동아일보, 양당국회대책 계엄논의 등 활성화]</ref> [[신현확]] 총리 역시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1200209201005&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5-12&officeId=00020&pageNo=1&printNo=18030&publishType=00020 1980년 5월 12일 동아일보, 정부 개헌일정 2~3개월 단축]</ref>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후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내각을 장악한다는 취지의 집권 시나리오를 모의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하여 정치활동 금지, 휴교령, 보도검열 등의 조치들을 내렸다. 신군부 세력은 이에 항거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사전 계획대로 국보위를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이후, 9월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헌법을 확정하고, 10월 27일 공포하였다. 이듬해 3월 3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 경제 ==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하의 70년대에도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19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77년부터 제4차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우선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경제구조에 균형이 잡히고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여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됐다. 1973년에 준공된 [[포스코|포항제철]]과 1978년에 준공된 [[고리원자력발전소]]는 이 시기 중화학공업의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면서 [[대한민국 공업진흥청|공업진흥청]]을 신설했다. 같은해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 ~ [[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했다.<ref name="qkrwjdgml"/> 70년대에는 중동의 석유수출국가들이 석유가격을 인상하여 경제발전에 압박을 가하였으나 수출은 꾸준히 지속되어 1977년에 100억 달러, 1981년에 2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수출상품에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넘어섰다. 그리고 공업생산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5%를 상회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건설업체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외화를 버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전체적으로 60년대와 70년대의 수출신장률은 연평균 40% 정도, 경제성장율은 8.9%를 기록하여 세계적으로도 개발도상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여 국민의 자존심을 부추기고, ‘하면 된다’는 말로 대표되는 박대통령의 강력한 신념과 개발독재형의 지도력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성취욕, 수천년 간 선진문명을 꾸려온 문화적 잠재력이 되살아난 것 또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랐다. 대외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의존성의 심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오는 산업불균형,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에서 오는 부패의 만연, 지역발전의 편차, 농촌의 피폐와 도시빈민층의 형성, 공해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이러한 모순점이 재야 및 학생운동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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