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191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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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現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무릉동]])에서 출생하였으며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였고 그의 [[호 (이름)|아호(雅號)]]는 인당(忍堂)이다.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으나 증언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땅재주를 넘는 어릿광대였으며, 그 재주로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에게 참봉(參奉)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ref>박동진 증언. (김기형,「원로예술인들에게 듣는다. - 박동진의 소리 세계」,『월간 문화예술』2001년 5월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1, P.89~90.)</ref> 그러나 부친은 국악과 일체 관련을 두지 않은 농사꾼이었다고 한다.
16세 때 [[공주시|공주]]에 들어 온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본 이후로 판소리에 빠지기 시작하여 18세 때에는 [[청양군|충청남도 청양]]에 거주하였던 손병두 문하에 들어가 처음 판소리를 익혔다. 헌데 손병두는 본래 명창으로 활동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동진은 손병두의 조부라 알려진 손필모의 주선을 받아 김창진(金昌鎭) 문하로 옮겨 《[[심청가]]》를 배웠다.<ref>김창진은 명창
25세를 전후하여 무절제한 생활로 목이 상하여 소리꾼으로서는 그렇게 행세하지 못하였고, 행세하는 경우에도 중앙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1944년]]에서 [[1952년]]까지 8년 간은 조선음악단, 김연수 창극단, 조향 창극단 등 창극단 생활을 전전하며 창극 무대에 서기도 하였고, 고수(鼓手)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다시 목을 되찾기 위해 100일 독공도 마다하지 않는 등 소리 수련을 계속하였는데 생활을 위해 햇님국극단에서 편곡과 무대감독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소리꾼으로 전면적인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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