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간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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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년(현종 22년) 홍인숭효광덕공신 수[[태위]] 겸 [[상서령]](弘仁崇孝光德功臣 守太尉兼尙書令)에 임명되고 개성국공(開城國公)에 봉작되었다. [[1034년]] 수[[태보]](守太保)로 승진하였고,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본지(本枝 본종(本宗)과 지손(枝孫) )를 굳게 하여 영세(永世)토록 함은 역대의 영유(令猷)요, 보옥(寶玉)을 나누어 이로써 친함을 두렵게 함은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법이라. 이러므로 척리(戚里 외척(外戚))를 숭봉(崇封)하여 왕가에 번병(藩屛)이 되게 함이요, 이미 원공(元功=원훈(元勳))이 있음에 마땅히 총수(寵數)를 더할 것이다. 아아! 그대 왕기(王基)는 영원(靈源, 마음)의 큰 자취이니 위기(偉器)로 이름이 났도다. 뜻은 충정(忠貞)에 돈독하고 몸은 협보(挾輔)에 부지런하였다. 이에 구석(九錫)의 법(法)에 따라 곧 삼공(三公)의 직(職)을 주고 진기(珍奇)한 것과 아울러 명복(命服)을 사(賜)하노라. 지금 모관(某官) 모(某)를 보내어 예를 갖추어 너를 책명(冊命)하여 수 태보(守太保)를 삼고 계(階)와 훈(勳), 기타(其他)는 다 옛과 같이 하노니 나의 큰 교훈을 체득하여 너의 깊은 정성을 힘쓸지어다."라 하였다.
 
[[고려 문종|문종]] 초에 평양공으로 진봉되었다. 문종 초, 그에게 병이 나자 문종은 직접 어의를 보내 그의 병을 돌보게 하였다. 1049년(문종 3) 수태사(守太師) 겸 내사령(內史令), [[1061년]](문종 15)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1061년]] 교위(校尉) 거신(巨身) 등이 정변을 기도하여, [[고려 문종|문종]]을 폐하고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