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잔글 →전쟁의 경과 |
||
45번째 줄:
페르시아는 3개의 부대를 보내어 이 반란을 진압했다. 해군은 이오니아의 그리스 해군에 의해 패배했지만 육군은 [[퀴프로스]]를 점령하고 카리아와 다른 여러 도시들의 항복을 받았다. 결국 이오니아는 고립되었고 페르시아의 대군에 밀려서 [[기원전 494년]] 함락되었다.
== 제1차 페르시아 침공 : 기원전 492년–490년 ==
{{본문|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93년]]까지 마지막까지 남은 반란군도 페르시아의 함대에 의해 괴멸되었고 페르시아는 이 기회로 [[에게해]] 동쪽의 섬들까지 제국의 판도를 넓혀갔다. 다리우스는 반란이 진압된 후 [[밀레토스]]에서는 신전을 약탈하고 주민은 모두 노예로 만들거나 강제로 이주시켰지만 나머지 반란 도시들은 놀랍게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사위인 [[마르도니오스]]를 이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해 뒷처리를 맡겼는데 지역별로 공평한 세금을 부과하고 민주주의도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부활시켰고 죄인들을 각자 자기 고향도시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다리우스 1세의 이러한 유화책은 그리스 본토에 대한 일종의 선전으로 보인다.
58번째 줄: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페르시아군이 더이상 무적이 아니고 그리스 국가들도 연합하여 싸우면 승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르시아에 굴복했던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아테나이와 스파르타의 편으로 돌아섰다. [[키루스 2세]] 이래로 정규군의 육전에서 한번도 패한적 없는 페르시아 육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유일하게 패배함으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고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의 약화를 우려할 처지가 되었다.
[[마라톤
한편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재침공을 위해 준비에 나섰으나 때마침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때문에 준비가 늦어졌고 [[기원전 485년]] 다리우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제위에 올랐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고 대략 4년에 걸친 전쟁 준비 이후 그리스 공략에 나섰다.
{{본문|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가 친히 이끄는 페르시아의 대군은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원정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보병만 170만 명, 기병 8만 명, 그리스의 페르시아 동맹군 32만 명 등 총 260만 명 이상의 규모라고 적고 있으나, 후대의 사가들은 80만 명이라고 적었고, 현대의 연구자들은 9만에서 30만 명으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