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 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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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이중]](邊以中, 1546년 ∼1611년) : 1573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2월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죽산(竹山)의 적둔(賊屯)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자신이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 내용에 따라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幸州大捷)에 크게 기여 하였다. 1593년 11월 조도어사(調度御使)가 되어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병마·군기·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저서 『망암집』이 있다. 사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변치명]](邊致明, 1693년 ~ 1775) : 1721년(경종(景宗) 1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751년(영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합격하였다. 이어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등을 거쳐 병조·이조·예조의 좌랑·정랑을 두루 역임하고, 1753년 사헌부지평에 재임하였으며,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한성부우윤]]·승정원승지 등을 역임한 뒤 176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묵포집』이 있다.
 
* [[변득양]](邉得讓, 1723년 ~ 1801년) : 1754년(영조 30)에 진사가 되고,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760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지방]]의 시관(試官)으로서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유생들의 항의로 1762년에 삭직당하였다. 곧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복직되었으나 왕의 부름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 1765년 삼례찰방(三禮察訪)에 기용되어 사간원의 헌납(獻納)·사간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69년에 승지에 오르고 1774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된 뒤 지돈녕부사·부사직(副司直) 등을 거쳐, 1793년(정조 17)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그뒤 판돈녕부사·판의금부사·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08 변득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