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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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씨의 위협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형식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굳히고자 쇼군 직위를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히데타다]]에게 계승하게 한다.<ref group="주">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노부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문제로 자결하였고, 차남 히데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후 히데요시의 실자가 태어난 후 유키 씨(結城氏)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외, 120 ~ 121쪽.)</ref><ref name="요시다104">요시다 외, 104쪽</ref><ref name="이길진212">이길진, 212 ~ 217쪽</ref> 그리고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을 보내 히데타다가 교토에 상경하였을 때 히데요리도 인사를 하도록 요구하였다.<ref name="이길진212"/> 하지만 히데요리가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자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보내 양해를 구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ref name="이길진212"/> 이에야스는 1607년 [[슨푸 성]]으로 들어가 명목 상으로는 은거하였지만 곧 스스로를 오고쇼({{llang|ja|大御所}})라고 지칭하면서 에도의 히데타다와 함께 2중 정치를 이끌었다.<ref name="요시다104"/><ref name="이길진212"/> 이에야스는 사망할 때까지 슨푸에서 9년 간 각양 각층의 측근들을 만나며 조언을 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통치 기구들을 만들어냈다.<ref name="요시다104"/><ref name="이길진212"/> 미카와 시절부터 이에야스에게 종사하던 원로들은 한 사람도 예외로 하지 않고 모두 은퇴해야만 했고, 대신 [[혼다 마사즈미]], [[나루세 마사나리]] 등과 같은 젊은 신참 다이묘와 행정 전문가, [[곤치인 스덴]], [[하야시 라잔]] 같은 승려와 유학자, [[자야 시로지로]], [[이나 다다쓰구]] 같은 경제 전문가와 거상(巨商), [[윌리엄 애덤스]] 같은 외국인 등이 오고쇼 정치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ref name="이길진212"/> 이에야스는 슨푸 성도 에도 성처럼 대대적인 증축을 개시하고 거리를 정비해 슨푸 성은 칠중오층의 천수각을 가진 거대한 규모의 성으로 재탄생하였고, 조카마치 또한 정치, 경제, 외교의 중심지로서 대성하였다.<ref name="요시다104"/><ref>요시다 외, 105쪽</ref>
한편 이에야스는 비록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전개하였다.<ref name="요시다132">요시다 외, 132쪽</ref> 기독교를 금지한 명령 곧 금교령은 이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후반에 히데요시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이에야스 대에 이르러서도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계속 찾아왔다.<ref name="요시다132"/> 처음에 이에야스는 이들을 지배 체제로 편입해 해외 무역의 확대를 도모코자 전교 활동을 묵인하였지만<ref name="요시다132"/><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156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이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지만, 무역은 보호{{.cw}}장려했기 때문에 그 포교를 묵인해 왔다. }}</ref> [[일부다처제]]의 부인이나 [[할복]]에 대한 금지,
[[파일:NagasakiNavalTrainingCenter.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데지마]] 일대와 해군 훈련소 ([[나가사키 시]])]]
이에야스는 슨푸에 머무르면서 무장 이외에도 여러 가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외교 및 무역의 고문으로서 적극 활용하였다.<ref name="요시다106"/><ref name="연민수155">연민수, 155쪽</ref> 1600년 네덜란드의 '데 리프데'(De Liefde)호가 규슈의 [[분고 국|분고]]에 표류하였을 때, 이에야스는 데 리프데 호의 선원이었던 [[얀 요스틴]], [[윌리엄 애덤스]] 등을 에도로 초청하여, 외교·무역 고문으로 삼고<ref name="연민수155"/><ref name="박석순214">박석순 외, 214 ~ 216쪽</ref> 네덜란드, 영국과의 무역을 추진하였다.<ref name="연민수155"/>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은 1609년과 1613년에 차례대로 일본에 내항하여, 이에야스의 허가를 받은 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였다.<ref name="연민수155"/><ref name="박석순214"/> 또한 [[스페인]]과의 교역에도 열의를 보여 1609년 [[가즈사 국]]에 표류한 [[루손 섬|루손]]의 전 총독 [[돈 로드리고]]를 교토의 상인 [[다나카 쇼스케]]에게 소개하여 무역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ref name="박석순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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