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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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Locator map Byzantion.PNG|thumb|비잔티움의 위치]]
 
'''비잔티움'''({{llang|el|Βυζάντιον|뷔잔티온, 비잔티온}}, {{llang|la|Byzantium|비잔티움}})은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의 원래 이름이다. [[기원전 667년]] [[고대 그리스]]의 [[메가라]]의 주민들이 식민지 도시로 건설한 뒤, 이들의 임금 뷔자스 또는 [[뷔잔타스]]({{llang|el|Βύζας 또는 Βύζαντας}})의 이름을 따 비잔티움이라 불렸다. [[라틴어|라틴식]] 표기인 “비잔티움(Byzantium)”이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다. 후대에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역사==
===기원전~4세기===
[[기원전 667년]] 무렵에 [[메가라]]의 식민지 인들에 의해 건설된 그들의 왕 ‘뷔잔타스’를 따서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원주민 [[트라키아 인]]의 도시가 있었다는 설도 있어 건설에 대해서는 전설의 영역을 넘지는 않았다.
 
그 후 [[기원전 5세기]] 초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까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기원전 478년]]에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비잔티움 공성전 (기원전 478년)]]으로 함락을 당했다. 그 이후 [[아테네]]의 속국이 되었지만 다른 도시들과 함께 [[기원전 357년]]에 반란([[동맹시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자치를 회복했다.<ref>데모스테네스 "로도스 인 방출을 위해" 3</ref> [[기원전 4세기]] 중반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트라키아 일대에 점령하여 [[기원전 340년]]에 비잔티움도 그의 의한 공격을 받았지만, 페르시아와 아테네로부터 원군을 지원 받아 마케도니아를 격퇴했다.
 
[[196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시대에 그와 대립하던 황제를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에 징벌로 도시는 파괴되었지만 곧 재건되었다. 이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중요한 건축물이 될 경마장([[술탄아흐메트 광장|히포드롬]])도 이때 건설된 것이 바탕이 되었다.
 
===4세기~15세기===
{{참고|콘스탄티노플}}
[[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이 동서남북 교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천연의 양항 [[금각만]]을 가진 것에 착안하여 [[330년]]에 로마에서 이 도시로 천도했다. 그후 수도에 걸 맞는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노와 로마’(‘새로운 로마’라는 뜻)로 개칭했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이 도시를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은 후세 이 도시의 옛 칭호를 따서 ‘[[비잔틴 제국]]’ 등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수도로 번영하였고, 중세 유럽의 주요 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 종교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여덟 이름을 가진 도시’로 알려졌다.
 
===15세기 이후===
{{참고|이스탄불}}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이후 제국의 수도로 다시 이 도시는 동부 [[지중해]] 지역을 커버하는 제국의 수도로 번성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점차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이름이 보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의 후신인 이스탄불은 속속 교외로 시가지를 확대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 후에도 [[터키]] 최대의 도시로서 번영을 계속하고 현재 전역에서 1000만 명에 가까운 인구를 가진 거대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주석==
{{주석}}
 
{{토막글|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