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위자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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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역사}}
[[인도네시아]]에는 일찍부터 [[인도]] [[힌두교]]가 들어와 그 영향을 받은 몇몇 작은 나라가 [[2세기]]경부터 점점 성장해갔다. [[7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그들이 연합하여 '''슈리비자야'''라는 커다란 나라로 통일되어 지금의 [[수마트라 섬]] [[팔렘방]]을 [[수도]]로 삼았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비문이나 중국인 [[의정]](義淨)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典)』으로도 스리비자야가슈리비자야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그리고 [[인도]]와 활발한 교역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항로의 가운데 위치하고, [[믈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의 중앙이라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었기 때문에 [[8세기]]에 접어들어 해상무역국가로 빠르게 발전했다. 때마침 서방의 [[아바스 왕조|이슬람 제국]]에서 상선(商船)이 자주 동쪽으로 나온 시기이고, [[당나라|당대]](唐代)의 중국도 이곳의 풍부한 시장성을 노려 중국인도 나라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스리비자야는슈리비자야는 중계무역지 구실을 하였다.
 
7세기 후반 인도에 유학했던 당나라 중 의정(義淨)이 도중에 스리비자야에슈리비자야에 들러 [[산스크리트어]] 연구와 [[불경]][[번역]] 등에 힘썼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나라 [[불교]]의 융성함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엽에는 [[말레이 반도]]의 일부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며 영토도 넓어져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10세기]]를 최전성기로 하여 그 뒤 쇠퇴해 [[14세기]]에 몰락했다.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