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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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정보
|이름=조선 효종<br />朝鮮 孝宗
|본명=이호(李淏)
|재위=[[1649년]] ~ [[1659년]]
|출생일={{출생일|16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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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孝宗御筆.jpg|섬네일|200px|효종의 한글편지]]
'''효종'''(孝宗, [[1619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ref><조선왕조실록 효종 대왕 행장> 모비(母妃)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인데, 향교동(鄕校洞)의 잠저(潛邸)에서 기미년 5월 22일 해시(亥時)에 왕을 낳았다.</ref> ~ [[1659년]] [[6월 23일]] ([[음력 5월 4일]]), 재위: [[1649년]] ~ [[1659년]])은 [[조선]]의 제17대 [[왕|임금]]이다. [[조선 인조|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왕자로 책봉되고 1626년 봉림대군의 작위를 받았다. [[1635년]] 대군사부로 임명된 [[송시열]], [[윤선도]], [[송준길]] 등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1637년]] [[정축하성]] 이후 [[소현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만에 귀국했다. 그 뒤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으면서 부왕 인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7년]]부터는 부왕 [[조선 인조|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고 [[1649년]] [[5월]] 부왕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척신들과 [[서인]] [[인조 반정|반정]] 공신들을 견제하면서 [[서인]] 산림 세력을 등용, [[김집 (1574년)|김집]], [[김상헌]], [[안방준 (1573년)|안방준]] 등과 그들의 문인들을 적극 발탁하였다. 이후 북벌론을 계획하였으며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을 시행하였으나 재위 10년만에 과로로 의원의 진료를 받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효종의 사망 당시 계모인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었는데, 그의 죽음은 [[예송 논쟁]]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휘]]는 이호(李淏),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자 (이름)|자]]는 정연(靜淵), [[호 (이름)|호]]는 죽오(竹梧)이며, 사후 시호는 '''효종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효종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孝宗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선왕'''(忠宣王)이다. [[송시열]], [[윤선도]], [[송준길]]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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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과 호란 ===
효종은 [[조선 인조|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렬왕후]]이며 성은 [[이씨|이(李)]], 휘는 호(淏), 본관은 [[전주이씨|전주]](全州),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비(妃)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이다.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아버지 능양군이 즉위하면서 왕자로 책봉되고,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5년]](인조 13년) [[송시열]]과 [[윤선도]] 등이 대군사부(師傅)에 임명되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그중 송시열은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조선]]의 현실을 [[금나라]]의 침략을 당한 [[남송]]과 같이 보았고, [[주자]]의 사상이 이를 극복하는 해답이라 보았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언급하자 효종은 '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주자이십니까'라고 반문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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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벌 계획 ====
{{참고|효종의 북벌|북벌론}}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 등 친청파(親淸派)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김집 (1574년)|김집]]·[[송시열]]·[[송준길]]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것은 군부국(君父國)인 명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당연한 의무라는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논리로 효종의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했다.
 
아울러 이러한 북벌론은 양란 이후 체제붕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층의 내실자강책(內實自強策), 즉 '국가재조'(國家再造)라고 하는 대내적인 지배안정책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의 친청세력이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일련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알려 청의 간섭을 유도함에 따라 즉위 초기에는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1651년(효종 2)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시켜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옥사(趙貴人獄事)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 군비 강화와 병력 징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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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정책 ====
효종은 경제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진전(陳田)이 증가하고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한편, 농민들은 파산하여 유리(流離)하는 등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질서·사회질서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효종은 이러한 위기를 부세제도의 개혁, 농업생산력의 증대, 사회윤리의 강화로 극복하려고 했다. 우선 [[김육]]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의 실시지역을 확대해 1652년에는 [[충청도]], 1653년에는 [[전라도]] 산군(山郡) 지역,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전세(田稅)도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한편 1655년에는 신속(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간행·보급하여 농업생산에 이용하도록 했다. 한때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의 유통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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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 (1574년)|김집]]은 직언을 한 선비를 해쳐서는 안된다며 김홍욱의 사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송시열, [[송준길]] 등이 김홍욱의 석방과 용서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어 김홍욱 구명 여론을 조성했다. 잠곡 [[김육]] 역시 김홍욱의 발언으로 형문을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석방을 탄원하였다. [[남인]] 측에서도 김홍욱의 구명과 석방 여론이 나타났다. 홍우원, [[허목]] 등은 김홍욱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석방을 건의했다. 중신들의 만류와 산림의 반대, [[김집 (1574년)|김집]]과 그 문하생들의 사면 탄원서와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직접 [[의금부]]에 추국장을 열어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 일가의 무죄가 입증 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한 효종에 의해 김홍욱을 국문끝에 장살로 살해하였다.<ref>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249~251 페이지 참고</ref><ref>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163 페이지 참고</ref>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ref>[http://korea-travel.kr/contents/travel.php?mode=view&idx=133 성암서원]</ref> [[1654년]]말 [[남인]] 홍우원은 [[홍문관]]수찬이 되었는데 홍우원은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의 사면, 복권여론을 주청하였다. 그는 소현세자의 빈 강빈(姜嬪)옥사의 허위임을 직언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김홍욱의 장살 사건 이후로 조야는 흉흉해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효종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던 [[서인]]과 [[남인]]에서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아 왕위를 전해야 되는데, 효종이 왕세자가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여론이 나타났다.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살아있는 가운데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는 폭발력을 안고 있었고, 이 문제는 그의 사후 [[예송 논쟁]]에서 [[윤선도]]가 다시 언급함으로써 도마에 오르게 된다.
 
=== 생애 후반 ===
문화면에서는 1653년 역법(曆法)을 개정,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간행했으며, 1656년에는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과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 警民編〉을 간행·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1657년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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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 :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 적1녀 : [[숙신공주]](淑愼公主, [[1635]]-[[1637]])효종이 세자 책봉받기 직전 요절
** 적2녀 : [[숙안공주]](淑安公主, [[1636년]] 4월 28일 - [[1697년]] 12월 22일) - 익평군(益平君)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
*** 외손자 : 홍치상
** 적1남 : [[대군]](요절) (? - [[1642년]] 4월 19일) - 심양에서 태어나 심양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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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효종의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었으며, 북벌 정책의 실제는 장기적인 방어전을 염두에 두었던 현실적인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 주석각주 및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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