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타 마사토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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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안]] 4년([[1651년]]) 쇼군 이에미쓰의 사망으로 아버지 마사모리가 이에미쓰를 따라 순사하면서, 그 유령 중에서 [[시모쓰케 국]] 내의 새로 개간한 농지 1만 석을 분할 증여받아 1만 3천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종5위하 [[빗츄 국|빗츄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그 후 이에쓰나 시대 때에도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여, [[만지]] 원년([[1660년]])에는 [[소자반]]이 되어 [[고즈케 국]] [[안나카 번]] 2만 석 영지를 받았다. [[간분]] 10년([[1670년]])에는 [[와카도시요리]]가 되었고, [[엔포]] 7년([[1679년]])에는 [[로주]]로 취임하여 2만 석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엔포 8년([[1680년]])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사망으로, 이에쓰나 정권 시대에 권세를 떨쳤던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와 대립하여, 이에미쓰의 이복동생인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덴나]] 원년([[1681년]]) [[음력 12월 11일|12월 11일]], 다다키요를 대신하여 다이로에 임명되었다. 취임 후에는 [[마키노 나리사다 (1635년)|마키노 나리사다]]와 함께 「덴나의 치({{lang|ja|天和の治}})」라 불리는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특히 재정면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조쿄 (1684년)|조쿄]] 원년([[1684년]]) [[음력 8월 28일|8월 28일]], [[에도 성]]중에서 종숙부로 당시 [[와카도시요리]]로 재직 중이었던 [[이나바 마사야스]]([[미노 국]] [[아오노 번]]주)의 손에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막부 측의 기록에 의하면 마사야스가 발광하여 마사토시를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건은 여러가지 억측을 불러왔고, [[오사카 부|오사카]]의 [[요도가와 강]] 치수 사업에 관한 의견 대립으로 살해했다는 설도 있었다. 또, 마사야스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이 암살 사건에는 쇼군 쓰나요시가 관여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