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시게히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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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년]] 11월, 시마즈 시게토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젠지로우. 어머니인 도미(都美)부인은 젠지로우를 낳은 후 사망. 아버지의 번주 취임으로 인해 공석이 된 가지키 시마즈가를 [[1753년]] 12월에 이어받아 효고 쿠몬이라고 불렸다. 아버지의 건강 악화와 1754년 2월의 계모 사망으로 본가의 자식이 태어날 가능성이 없어지자 그해 8월 영주의 후계자 자격으로 본가에 복귀하였다. [[1755년]] 6월, 아버지 시게토미의 사망으로 번주직을 승계했다. 참고로 가지키 시마즈가는 이후 19년간 당주 부재가 된다.
 
[[1758년]] 6월에 이름을「시게히데」로 고치고 종4위하의 관직을 받았다. 어린 시게히데를 대신하여 [[1760년]]까지 조부 [[시마즈 무네노부]]가 번의 정치를 돌보았다. 조부의 사망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번정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시게히데는 [[난학]]에 대단한 흥미를 나타내어 [[나가사키 시|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을 방문하고 네덜란드 배에 직접 승선해보기도 했다. [[1764년]] 11월 종4위상 관직을 받았다. [[1773년]] 번교·사츠마시의 번교나연무관을 설립해, 교육의 보급에 노력했다. [[1779년]] 명시관(천문관)을 설립하여 역학과 천문학의 연구를 지원했다. 의료 기술의 양성에도 진력해 [[1774년]] 의학원을 설립한다. 그리고, 앞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에 무사계급만이 아닌 일반 백성에게도 다닐 기회를 주었다.
 
[[1787년]]1월, 상속자인 장남 [[시마즈 나리노부|나리노부]]에게 번주 지위를 내주고 은거하였지만, 실권은 양보하지 않았다. [[1809년]] 근사록붕괴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아들인 나리노부가 카바야마 치카라,치치부 타로등 근사록파를 등용해 긴축 재정을 행하려 했지만 화려한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 시게히데가 이에 반대하여 나리노부를 은거시키고 카바야마 등에게 자살을 명한 사건이다. 그리고 손자 [[시마즈 나리오키]]를 번주로 옹립하고 자신이 후견인이 되어 더 큰 권력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나리오키는 시게히데의 만년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재정개혁을 시작하게 되어 하급 무사인 즈쇼 히로사토를 중용했다. 즈쇼의 재정 재건은 나리오키가 친정을 하게 된 이후부터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