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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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 셔먼 호는 미국의 군인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이름을 딴 것이었고, [[톈진]](天津)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 W. B. Preston)의 소유였다. 그는 톈진에 기반을 둔 영국 회사 메더우즈 앤 컴퍼니(Meadows and Co.)로부터 [[비단]] · [[유리그릇]] · [[천리경]] · [[자명종]] 등의 상품<!--영어판에서는 면 · 주석 · 유리라고 한다.-->을 사들여 적재하였고, 중화기로 무장하였다. 이 배의 승무원은 선장 페이지(Page), 1등 항해사 윌슨(Willson), 13명의 청국인, 3명의 [[말레이시아인]]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유주 프레스턴도 배에 올랐고, 영국인 호가스(Hogarth)와 항해사 겸 통역인 역할을 위해서 런던 선교회 소속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도 승선했다. 이들은 1861년 5월에 굴욕적으로 개항된 체푸(Chefoo, 현재의 옌타이)를 8월 9일에 출항하여 8월 16일에 조선의 해안가에 당도하였다.<ref>고종실록 제3권</ref> 셔먼 호는 중국 [[정크선]]의(선장 유화태—Yu WauTai) 인도로 8월 20일(음력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유화태는 1865년말 토마스가 황해지역에 왔을 때 타고 왔던 배의 선장이며 토마스에 의하면 20년 이상 조선인과 무역을 하였다.<ref>Rev. Thomas's letter dated 12 January 1866 published in Missionary Magazine July 1866</ref>
 
마침, [[프랑스]]의 군함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고, 지방 관리들은 페이지 선장을 만났고, 원활히 의사소통을 하였다. 즉, 이들은 셔먼호가 평양에 온 목적을 물었다.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항해 목적에 대하여서는 상거래를 위한 것일 뿐임을 강조하며, 그들이 가져온 비단 · 자명종 등을 [[쌀]] · [[사금]] · [[홍삼]] · [[호표피]] 등과의 교역하자고 제의하였다. 조선인들은 모든 상거래 제의를 거부하되 승무원들에게 식량과 보급품을 제공하는데에는 동의하였다. 조선인들은 좀더 고급 관리와 상의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페이지 선장에게 말해 두었다. 그러나, 셔먼 호는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평양 서쪽에 정박하였다. 많은 비와 조수차로 인하여 대동강은 여느때보다 깊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제너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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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너럴 셔먼호의 공격과 평양성 군민들의 반격 ===
 
[[8월 21일]]([[음력 7월 12일]]) 조선 측의 이와 같은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만경대 (평양)|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官民)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셔먼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하여 강변의 군민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맞서 대항하고,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은 배를 타고 가서 이현익을 구출해 내었다.
<!--미정리 평양감사 [[박규수]]는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보내어 식량을 공급하게 하였다.
 
영국인 [[최난헌]]이(매천야록에 미국인 최난헌으로 기록되
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그러나 서양 선박의 내항과 통상의 요구는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미루어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이유로 거절하고, 그들에게 즉시 출국할 것을 요구하였다.-->
 
=== 제너럴 셔먼호의 공격과 평양성 군민들의 반격 ===
[[8월 21일]]([[음력 7월 12일]]) 조선 측의 이와 같은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만경대 (평양)|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官民)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셔먼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하여 강변의 군민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맞서 대항하고,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은 배를 타고 가서 이현익을 구출해 내었다.
 
영국인 [[최난헌]]이(매천야록에 미국인 최난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난헌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의 한국이름이다.) 군함 1척을 이끌고 조수를 타고 [[대동강]]에 들어왔지만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군함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ref name="lee34">{{서적 인용 |저자고리= 황현|기타= 정동호 옮김|제목= 매천야록|연도= 2011|출판사= 일문서적|쪽= 34}}</ref> 당시 며칠씩 계속된 비로 강의 수위가 높아졌다가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평상시 수위로 돌아가게 되자 셔먼호는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대포를 발사하는 등 폭력을 자행하여 평양 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박규수는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구하던 중 한 교졸이 지원했다. 이 교졸은 어촌의 괴피선(작은 배) 수백 척을 동원하여 배안에 기름을 끼얹은 뒤 섶을 가득 실어 불을 지르게 하고 궁수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을 당기게 하였다.<ref name="lee34"/>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8월 30일]]([[음력 7월 21일]])부터 포격을 가한 뒤 대동강 물에 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승무원 23명 가운데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