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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된<ref name="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이후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동안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정권에 의해 '반동'으로 분류되어 국군 북진중 적유령 산맥에서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 방치되었다가 그 후 병원으로 후송되어 결국 그해 11월 사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에서는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서 폭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 죽음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기 위함이다.
 
그의 납북과 죽음에는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홍명희|홍명희(洪命熹)]]의 차남으로 간첩으로 남파되었던 둘째사위인 홍기무(洪起武)가<ref name="spy1">[http://db.history.go.kr/id/npfp_1949_12_25_v0002_0390 홍기무(洪起武) 등 기소] 자유신문 1949년 12월 25일<br>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1225003292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2-25&officeId=00032&pageNo=2&printNo=1035&publishType=00020 傀儡(괴뢰) 앞잡이 洪命熹(홍명희) 아들 等送廳(등송청)] 1949.12.25 경향신문 2면 : 이북 괴뢰집단 부수상 홍명희(洪命熹)의 둘째아들 대의사 홍기무(洪起武)와 번일병(憣一炳)외 3명<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21600329202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2-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084&publishType=00020 民國(민국)의機密(기밀)을노리는 第五列(제오열)에注意(주의)하자] 1950.02.16 경향신문 2면</ref> 상당히 관련되었다는 것이 넷째 아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이다.<ref name="hkm">[http://dongne.donga.com/2010/08/09/d-story-44-%EC%A1%B0%EC%84%A0%EC%9D%98-3%EB%8C%80-%EC%B2%9C%EC%9E%AC%EC%99%80-%EB%8F%99%EC%95%84%EC%9D%BC%EB%B3%B4-%ED%99%8D%EB%AA%85%ED%9D%AC-%ED%8E%B83/ D-story 44 : 조선의 3대 천재와 동아일보-홍명희 편(3)] 2010.08.09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 차남 홍기무(洪起武)는 위당 정인보의 사위인데,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6.25 때 장인 위당을 납북했다.<br>[http://dongne.donga.com/2013/06/19/d-story%E2%85%A1-%EB%82%A9%EB%B6%81%EB%90%9C-%EB%8F%99%EC%95%84%EC%9D%BC%EB%B3%B4-%EC%9D%B8%EC%82%AC%EB%93%A4/ D-storyⅡ 100 : 납북된 동아일보 인사들]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6월 - 19 - 2013</ref><ref name="testi">[https://www.youtube.com/watch?v=vWjN2GYw688 4남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부친 납북 당시 일에 대한 증언 (동영상)]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 게시일: 2013. 12. 11.</ref>
 
{{인용문|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의 둘째 사위였습니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
 
“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ref name="hkm"/><ref name="testi"/>}}
 
6.25 당시 사돈 [[홍명희|홍명희(洪命熹)]]는 남침 주범 [[김일성]]의 장인이었고,<ref name="hys">[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9088866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