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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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703y00_02.pdf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3일 면수:06 단수:15<br>
[http://db.history.go.kr/id/su_003_1915_05_26_0290 今日 卒業한 日本士官學校 第27期] 매일신보(每日申報) 1915.6.18</ref>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잘 밝혀져 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393376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61~264</ref> 극작가 [[오영진|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처남의 장인이 김인욱이라 당시 일에 대해서 김인욱 본인의 말을 정확히 전해 들었던 사람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과 몇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김인욱 아닌 김석원이 당사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ref>오영진(吳泳鎭, 1916-1974),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 서울, 중앙문화사(中央文化社), 1952. 06. 10.
(서울, 국토통일원, 1983, 재발간) 재간본 pp.90~91, pp.98~100</ref> 북한 측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김일성 가짜설|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같은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동하여 그 공을 가로챘다. 오영진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북한 김일성이나 그 처라는 김혜순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6.25 때 남침한 그의 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인게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