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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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훈 :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박준성)}}</ref>
 
그리고 실제로 위에서 거론한 <김 부대의 분전기(金 部隊의 奮戰記, 매일신보, 1938년 03월 11일 3면 1단)>, <전진여담(매일신보, 1939년 03월 29일 3면 3단)><ref>金錫源少佐의 등은戰塵餘談① 모두戰苦闘廿一個月 만주에서의炎熱百廿度를 독립군征服·東西馳驅 토벌이武勳을 아닌말하는 중국感狀과 북부表彰狀 전선에서의/ 국민당군과의每日申報 싸움에서1939년 올린03월 전공을28일 다룬03면 것이다.01단<br>金錫源少佐의 [[태평양戰塵餘談② 전쟁]]秋霜가튼 때는前進令 학병으로名部隊長大喝一聲에 참전할諸將兵·飢渴을 것을克服하며 권유하는舊戰 강연회에/ [[이응준每日申報 (군인)|이응준]]1939년 등과03월 함께29일 참가하기도03면 했다.01단<br>
金錫源小佐의 戰塵餘談③ 雪岳下의 大殱滅戰 洪原高地와 東原高地서 奮鬪 殊勳·三千大敵擊退 / 每日申報 1939년 03월 30일 03면 05단</ref> 등은 모두 만주에서의 독립군 토벌이 아닌 중국 북부 전선에서의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올린 전공을 다룬 것이다. [[태평양 전쟁]] 때는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강연회에 [[이응준 (군인)|이응준]] 등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