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감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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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대전에서는 삼감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정작 삼감이 누군지는 등장하지 않아서, 삼감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한대 이후 계속되었다. 사기의 관숙과 채숙을 삼감 중 둘로 보아도 한 명이 비는데, 이 한 명을 《일주서》 작락해에서는 [[곽숙 처]]를 꼽았고 《상군서》에서도 “주공 단이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하고 곽숙을 유배했다”고 하여 곽숙이 삼감의 난에 가담했다고 보였다. 그러나 《좌전》, 《여씨춘추》, 《국어》, 《회남자》에서는 삼감에 대한 언급이 없고, 관숙과 채숙만을 가담자로 거론했다. 또 《맹자》, 《순자》 유효편, 《일주서》 극은해, 대광해에는 관숙의 이름만이 보인다. 한편, 《한서》에서는 무경 · 관숙 · 채숙을 삼감으로 꼽았으나, 상나라 왕자인 무경이 상나라 유민의 감시를 맡게 된다는 점, 또 상서대전에서 무경과 삼감이라 하여 무경은 삼감에서 제외한 듯하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있다.<ref name="sssh17"/>
 
삼감의 난을 언급하는 여러 문헌에서 관숙만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진몽가(陳夢家)는 관숙이 주모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정열은김정열교수는 삼감의 3이라는 숫자가 참으로 감이 세 명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수, 혹은 무한의 수를 대표하는 수로 3을 언급한 것일 가능성을 제시했다.<ref name="sssh17"/>
 
관채의 난에 대한 설화는 전승 과정에서 본디 관숙 혹은 관숙과 채숙만을 반란자로 언급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삼감의 수효에 맞춰져 무경이나 곽숙 등이 구성원으로 끼어들어갔다. 이러한 전승의 발전을 살펴볼 때, 삼감의 난이 기록되었을 당시에는 이미 서주시대의 감(監)이란 직위에 대한 이해나 삼감의 난 그 자체를 기록에 남긴 사건의 전모가 희미해졌음이 엿보인다.<ref name="sssh17"/>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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