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시게히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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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1월, 상속자인 장남 [[시마즈 나리노부|나리노부]]에게 번주 지위를 내주고 은거하였지만, 실권은 양보하지 않았다. [[1809년]] 근사록붕괴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아들인 나리노부가 카바야마 치카라,치치부 타로등 근사록파를 등용해 긴축 재정을 행하려 했지만 화려한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 시게히데가 이에 반대하여 나리노부를 은거시키고 카바야마 등에게 자살을 명한 사건이다. 그리고 손자 [[시마즈 나리오키]]를 번주로 옹립하고 자신이 후견인이 되어 더 큰 권력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나리오키는 시게히데의 만년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재정개혁을 시작하게 되어 하급 무사인 즈쇼 히로사토를 중용했다. 즈쇼의 재정 재건은 나리오키가 친정을 하게 된 이후부터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게히데는 증손자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재능을 높이 사서 나리아키라와 함께 시볼트(Siebold)를 만나 당시 서양의 사정을 듣기도 했다. 또한 시게히데는 로마자를 쓸 수 있었고, 네덜란드 어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회견한 시볼트는「시게히데公은 80여세라고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60세 전후로밖에 안 보인다. 개방적이고 총명한 영주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란가쿠란카쿠|난학]]에 깊이 빠져 이른바 「란벽」영주의 대표로 불리기도 한다.
 
[[1833년]] 1월, 에도의 타카나와 저택에서 향년 89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