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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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 ===
[[파일:Bupyeong-gu Incheon Korea.jpg|thumb|부평구 주요부. 앞에 보이는 공장이 한국GM이다.]]
1955년 일제 시대 지어진 부평 자동차 공장(오늘날 [[한국GM]] 자리)에서 [[국제차량제작 시발]]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 지프차의 부품을 재사용한 국제차량제작 시발은 1957년 정부의 보유차량대수 제한조치로 타격을 입고 1964년 생산을 중단하였다. 부평의 자동차 산업은 이후 [[새나라자동차]], [[신진자동차공업]],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한국GM을 거쳐 계속되었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년|ISBN=89-89014-07-7|pages=283-285}} (상권)</ref>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수출주도형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인천은 서울에 인접한 주요한 항구로서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과 함께 수출 단지로서 육성되었다. 1965년 인천수출산업공단이 설립되었고, 1969년부터는 주안기계공업단지가, 1970년부터는 인천 비금속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인천은 [[제조업]] 중심의 도시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제조업 내에서 [[경공업]]의 비중이 현저히 감소하는 대신,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인천도 동일한 변화를 겪게 되어 1980년대에 [[남동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남동공업단지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인천의 용도지역 부적격업체 650여개를 포함한 수도권 내 이전대상 1,800여 업체가 연차적으로 입주하였다. 입주대상 대다수는 석유화학 및 조립금속 등의 중화학업체였다.<ref>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인천역사문화총서 30,《인천 경제의 재조명》, 2006년, 16-17쪽</ref>
 
인천의 연안은 원래 [[갯벌]]이 넓게 발달한 지역이나 산업단지의 건설로 많은 간척이 이루어져 해안선이 크게 변화하였다. 가장 많은 간척이 이루어진 시기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80년대로 인천 간척지의 46.2%가 이 때 형성되었다. 간척지는 산업 용지와 주거 용지로 사용되었으며, 서구, 연수구, 중구는 도시 용지 중에서 50% 이상이 간척으로 새롭게 건설된 땅이다.<ref>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인천의 갯벌과 간척》, 2009년</ref> 계속되는 간척으로 인천 앞바다의 갯벌을 생계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어촌계는 하나 둘 문을 닫았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년|ISBN=89-89014-08-5|pages=58-61}} (하권)</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