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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 (송)|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 (십육국)|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 (역사)|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다.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등의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문제는 왕홍(王弘), 왕화(王華), 은중심(殷仲甚) 등의 귀족을 존중하고 문치를 내세운 30년간의 치세는 "'''원가의 치'''"라 불릴정도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문제는 수재의 직을 기한을 두어 지방을 안정화 시키고, [[430년]] 전서법(錢署法)을 두어 4주전(鑄錢)을 주조하여 일시에 화폐 경제를 부흥시켰다. [[438년]] 유학, 현학, 문학, 사학의 4학을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어 동진의 유민 도잠과 사령운, 안연지 등이 시문세계에서 활약했고, 토번과 하서왕 등과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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