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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왕화사상(王化思想)을 기조로 하여 주변 국가들의 이적(夷狄)들이 「중국의 덕(德)을 사모해」조공을 행하고, 이에 대하여 회사(回賜)를 내리는 형식으로 조공은 이루어졌다
본래 유교 사상이 강해지기 전까지는 진짜 조공이었지만 나중에는 사상적 변화에 따라 점차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조공의 실체는 옛날 민족주의적 학자들이 주장한 것과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실제로도 멀지 않은 과거인 청나라와의 조공은 그 자체로만 한정하면 조선의 10배 이상 손해였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0473&content_id=cp030104730001
책봉을 통해 중국 왕조의 신하로 편입된 책봉국은 원칙적으로는 해마다 조공할 의무가 있었지만, 책봉을 받지 않은 나라라고 해도 조공을 행할 수는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견당사]](遣唐使)는 「중국과의 대등한 무역을 하고자 한다」고 했고 이에 대해 중국측은 「먼 나라에서까지 해마다 조공할 의무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는 책봉국에서 바치는 조공은 경제적 이득 뿐 아니라 서적 구입, 정보 수집 등 사회・문화적 이익도 함께 따랐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양상이 반대로 행해졌다. [[요나라|요]](遼)에 대해서는 가까스로 상위(上位)로써 중화 왕조의 체면을 유지했지만, 신흥 왕조 [[금나라|금]](金)에 대해서는 송 왕조 쪽에서 하위(下位)가 되면서 공물을 바치는 형태가 되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원]](元) 왕조에서는 조공이라 불리는 형식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명나라|명]](明) 왕조가 세워지고 나서 다시 조공 형식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회사에 드는 경비는 여전히 막대했고, 그 뒤 명 왕조는 조공 제한으로 방침을 전환하였다.
[[청나라|청]](清) 왕조에서도 유럽 국가와의 교역을 기존의 조공의 감각으로 대하며 무역했지만, 그 결과 유럽 국가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아편전쟁]]의 불씨를 제공하였고, 중국은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고 만다. [[조선]] 왕조는 [[베트남]] [[응우엔 왕조]](阮朝), [[류큐 왕국]](琉球王国) 등과 함께 조공을 행했지만, 일본의 [[류큐처분]](琉球処分)으로 류큐가 일본에 강제 합병당하고,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청일전쟁]]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한 뒤 조선의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됨으로써 이후 조공 형식의 대외관계는 소멸하였다.
== 국가별 ==
조공과 화사는 국가마다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존에는 비교 우위나 시세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아 가치가 제대로 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실체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 한국 ===
[[한국]]의 역대 조정은 중국 왕조와의 분쟁을 미리 막고 실리 목적으로 조공을 했지만, 중국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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