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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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약력은 다음과 같다.<ref>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작가 약력 (책날개)</ref>
 
1957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태어나 [[고흥군]]·[[벌교읍]]에서 자랐다. 16세에 상경하여 [[선린상업고등학교]](야간부)를 졸업한 후 섬유·화학·금속·정비·운수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다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내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된 《노동의 새벽》은 당시 ‘잊혀진 계급’이던 천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었고, 젊은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면서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1985년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고, 1989년 한국에서 사회주의를공산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 결성을 주도했다. 1991년 3월 구속 후 24일간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국가보안법상 소위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펴냈다.
 
1998년 8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복역 8년만에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2000년부터,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회적 발언을 금한 채,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현장을 돌며 평화운동을 전개해 왔다. [[2003년 이라크 침공|2003년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선언 직후 전쟁터로 날아가 반전 평화운동을 전개했고, [[아체]], [[쿠르디스탄]] 및 [[발칸 반도]]와 [[아시아]] 여러 나라,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2010년, 그동안 해외 분쟁 지역에서 평화운동을 하며 촬영한 사진을 모아 첫 사진전 [http://www.ra-wilderness.com/ <라 광야>展]과 [http://www.likethem.kr/ <나 거기에 그들처럼>展](세종문화회관)을 열었다.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로 기록해온 사진은 사회의 이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인사말에서, 중동-아랍지역은 사회주의공산주의 공백을 미국 패권주의가 뒤덮을 때 이를 견제하고 인류 약자의 정의를 지켜온 중요한 축이자 희생자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변함없는 진보적 가치에 대한 신뢰와 열정을 드러냈다. 국내외 현장에서 쓴 304편의 시를 엮어 12년 만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현재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내건 사회단체 ‘나눔문화’를 중심으로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대안적 삶의 비전 제시와 ‘평화나눔’ 활동과 사회 진보운동에 진력하고 있다. 박노해라는 이름의 뜻은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하여]]'를 줄여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