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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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과 국토의 분단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대내적으로 정파(政派)의 난립과 사회혼란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시기였던데다가, 북한이 [[38선]] 부근에서 군사적 도발행위를 자행하고 대한민국에서 게릴라와 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외교는 처음부터 국가안보외교(國家安保外交)가 중심이 되어야 했다.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적 뒷받침이 필요했다는 특수관계 때문에 대미(對美) 외교에 제일 큰 비중을 두어야 했다.
 
미국과의 정식 국교 수립 후, [[한국 전쟁]]까지의 초창기의 한국의 대미외교는 사회 · 경제적 불안, 맹목적인 국민의 통일염원 및 점증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보장과 지원을 확보하려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적인 것이 못 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사정 때문에 대폭적으로 군사비를 삭감해야 했고, 그 결과로 병력감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한국으로부터의 철군(撤軍)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은 원자탄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지전 또는 제한전은 원자탄의 위협 때문에 발생치 않을 것이라고 오판하게 되어, 주한미군의 철수가 전략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대한민국 행정부는 사절단 파견과 주미대사관을 통해 군사원조를 획득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대미 교섭의 논거로 삼은 것은 한국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도 있고, 한국안보는 미국에도 중요하며, 소련의 원조와 사주를 받은 북한의 무력남침 위협이 촉박하다는 것, 그리고 한국은 무기만 있으면 즉시 통일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말부터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도발을 우려한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 한편 그해 유엔총회에서는 韓國승인과 더불어 外軍철수가 결의되자 그해말부터 美軍이 철수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北傀의 도발을 우려한 李대통령은 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美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의 옛친우인 [[더글러스 맥아더]]를 다시 찾아갈 결심으로 특사를 먼저 파견해 보았으나, 맥아더의 반응은 냉담했다.(1949년 1월) 결국, 미국은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KMAG) 의 자격으로 500여명의 병력만 남겨 놓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주한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인천항을 떠날 때 한국군은 그들로부터 구일본군의 총기와 탄약 그리고 미군의 잉여재산법에 따라 미군무기와 약간의 함정을 양도받았으나 이 것은이것은 약 5만의 지상병력을 무장할 장비에 지나지 않았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 한국은 처음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강력히 반대했으나 일단 미군의 철수가 단행되기 시작하자 무기원조 획득에 집중적인 정책을 폈다.
 
경제면에서는 미군정이 한국에 제공해온 구호적 성격의 가리오아자금([[:en:GARIOA|GARIOA]] 資金, 미국 점령지역에 대한 구제자금)이 경제협조처(ECA,[[:en: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로 이관되어 제공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부흥대책을 위해 [[마셜 플랜]]을 모방하여 장기원조계획을 입안(1949년 6월 )하였으나, 이 한국경제원조안은 1950년 1월 미국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부결의 원인은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몰락하자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공화당 의원들의 비협조적인 의회전략 때문이었다. 한국에 대해서는 미미한 원조(극동경제원조안(極東經濟援助案))만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뿐이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하여 장기원조계획을 입안하였으나 이 안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의 몰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공화당의원들의 비협조적인 의회전략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미미한 원조만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뿐이다.--> }}</ref> 이로서 1950 회계연도에 9천만 달러가 할당되긴 했으나 [[한국 전쟁]]시까지 불과 4,500만 달러만이 사용됨으로써 한국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ref name="글로벌 한미관계 초창기의 대미외교">《[[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초창기의 대미외교|초창기의 대미외교]]〉</ref> 이와 더불어,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바깥에 있다고 해석된 [[애치슨 선언]]의 결과, [[한국 전쟁]] 직전에는 현대식 무기로 장비한 20만 대군을 가진 북한과 38선을 경비하는 데도 불충분한 정도의 경무장을 갖춘 한국군 사이에 군사적 불균형이 심하게 나타나게 되어 북한이 남침을 촉진하게 된 것이다.<ref name="글로벌 한미관계 초창기의 대미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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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군사원조 갈등 (1948~50년) ====
 
한국 정부는 [[이승만]]의 집권시부터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에 충분한 군비(軍備)를 지원해 달라고 촉구해 왔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옛 친우이자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019003292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0-19&officeId=00032&pageNo=1&printNo=632&publishType=00020 大統領今日渡日]〉 경향신문(1948년 10월 19일) 1쪽. <!--“...李承晩大統領은 夫人 同伴하여 ... 聯合國總司令官 「맥아더」元帥에 對한 答禮次로 드디어 今 十九日 今朝 金浦空港을 떠나 東京으로 向發하였는데...이번 同行하는 隨行員은 다음 같다. 鄭翰景 博士 秘書 金良千氏 公報處長 金東成氏 公報局長 李貞淳氏”--></ref><ref name="비록한국외교28">{{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7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7&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8&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 날짜 = 1975-03-17 | 출판사 = 경향신문}}</ref> 이승만이 귀국한 다음날, [[대한민국 제헌국회|대한민국 국회]]는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대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1/1/001za0109b.PDF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1948년 10월 21일)</ref> 등을 통해 이 것을이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유엔 총회]]에서 한국 내 외국군대 철수가 결의되자(1948년 12월 12일)<ref>[[:s:en: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 <!--3. Recommends that the occupying powers should withdraw their occupation forces from Korea as early as practicable;--></ref> 1948년말부터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 요구에 대해 [[미국 국무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은 맥아더를 다시 찾아갈 결심으로 1949년 1월말, [[변영태]] 특사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냈으나<ref>《경향신문》(1949년 1월 29일자) 1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1290032920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1-29&officeId=00032&pageNo=1&printNo=719&publishType=00020 駐比 特使에 卞榮泰博士]〉 <!--“駐比 特使로 任命되었던 尹致暎氏의 固辭로 因하여 後任에 卞榮泰博士를 지난 二十七日附로 決定 任命하였다고 政府에서 二十八日 發表하였다.”--></ref><ref>《경향신문》(1949년 2월 3일자) 1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03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2-03&officeId=00032&pageNo=1&printNo=723&publishType=00020 卞駐比特使 卄七日出發]〉 <!--“駐比特使 卞榮泰氏는 오는 七日 金浦空港을 出發하여 途中東京에서 二日間滯留後 任地 「마니라」로 向할 豫定이라 한다.”--></ref> 맥아더는 "내 임무는 명확히 규정되어 카르빈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면서 [[딘 애치슨]](국무장관 서리)만을 비난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ref>변영태 저, 외교여록에서</ref> <!--인용문: “따라서 北傀의 도발을 우려한 李대통령은 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美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결국 그는 그의 옛친우인 매카더장군을 다시 찾아갈 결심으로 1949년초 卞榮泰 특사를 매카더사령부에 보냈으나 매카더는 『내 임무는 명확히 규정되어 카르빈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면서 애치슨 국무장관만을 비난했다(外交餘祿 卞榮泰著).”-->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과의 군사원조 교섭을 비밀리에 실천하라는 지시에 따라, 주미 대사 [[장면]]은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의회내 극우파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이에 대하여 미국 국무성의 극동담당 차관보인 월튼 버터워스([[:en:William Walton Butterworth|W. Walton Butterworth]])는 장면 대사를 경고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6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26&officeId=00032&pageNo=4&printNo=9076&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32> : 政府樹立 직후⑭ | 날짜 = 1975-03-26 | 출판사 = 경향신문}}</ref> 1949년 6월 14일 장면은 [[딘 애치슨]]과 회담하고 무기 원조를 요청하였다. <!--회담의 결과--> 결국, 주한미군에 대한 소련의 날카로운 비난도 겹치고 해서 미국은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자격으로 500여명의 병력만 남겨 놓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인용문: “이듬해 6월29일 駐韓美軍의 마지막부대가 仁川항을 떠날 때...”--> 1949년 12월 중순,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한일 병합 조약|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미국은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ref>유영익 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64페이지</ref> 1950년 1월 20일, 장면과 극동 차관보 버터워스가 다시 만났으나, 미국은 의회 동의 없이는 한국 원조를 위한 예산을 편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ref name="images.library.wisc.edu">{{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7.pdf | 제목 = FRUS 1950 Vol. VII Korea |쪽=11-14 }}</ref>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를 시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내기도 했다. "존경하는 장군...부디 우리국민을 도와주십시오... 지금 우리내외는 장군의 협력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ref>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이승만 : 신화에 가린 인물(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1954) {{쪽|날짜=2013-08-08}}</ref> 프란체스카의 편지를 받은 맥아더는 때마침 대일 청구권 관계로 대일 강경책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던 이승만에게 한-일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해 다시 이승만을 초청했다. 무초 주한 미국 대사로부터 맥아더 장군의 초청을 통보받은 이승만은 1950년 1월 21일 [[임병직]] 외무부장관, [[장기영 (1903년)|장기영]] 체신부장관, [[고재봉]], [[김광섭]] 두 비서, 무관으로 [[정일권]] 대위를 대동하고 두 번째로 맥아더의 애기(愛機) 바탄호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맥아더는 그러나 이때도 이승만의 한국방위에 대한 주장을 고무해주었으나 무기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회피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