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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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공직자 정보
|이름 = 루트비히 빌헬름 에르하르트
|원래 이름 = {{lang|de|Ludwig Wilhelm Erhard }}
|그림 = Ludwig Erhard 916-13281330.jpg
|크기 그림설명 =
|설명국가 = [[1964년]] [[3월 3일]]{{국기|서독}}
|직책 = [[독일의 연방수상|연방수상]]
|국가 = 독일
|임기 = [[1963년]] [[10월 16일]] - [[1966년]] [[12월 1일]]
|국기 연도 =
|대수 = 2
|취임일 = [[1963년]] [[10월 17일]]
|퇴임일 = [[1966년]] [[11월 30일]]
|대통령 = [[하인리히 뤼브케]]
|부수상 = [[에리히 멘데]]
|군주 =
|국적전임 = [[독일콘라트 아데나워]]
|후임 =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출생일 = {{출생일|1897|2|4}}
|출생지직책2 = [[독일독일의 제국]] [[퓌르트부수상|부수상]]
|수상2 = [[콘라트 아데나워]]
|임기2 = 1957년 10월 29일-1963년 10월 15일
|전임2 = [[프란츠 블뤼허]]
|후임2 = [[에리히 멘데]]
|직책3 = [[연방경제에너지부|경제연방장관]]
|수상3 = [[콘라트 아데나워]]
|임기3 = 1947년 9월 20일-1963년 10월 15일
|전임3 = [[발터 풍크]]
|후임3 = [[쿠르트 슈뮈커]]
 
|출생일 = {{출생일|1897|202|404}}
|출생지 = [[바이에른 왕국]] [[퓌르트]]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77|5|5|1897|2|4}}
|사망지 = [[{{국기|서독]]}} [[본 (독일)|본]]
|대수 거주지 = 2
|정당 =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학력정당 = [[프랑크푸트르 대학교무소속]]
|종교내각 = [[루터교]]
|소속 집단 =
|배우자 = 루이제 로터
|국가부모 = 독일
|배우자 = [[루이제 로터]]
|자녀 = 1명
|부모학력 = [[괴테 대학교]]
|서명종교 = [[루터교]]
|전임서명 = 콘라트Ludwig 아데나워Erhard signature.JPG
|전임대수서훈 = 1
 
|후임 =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후임대수 = 3
|웹사이트 =
}}
 
'''루트비히 빌헬름 에르하르트'''({{llang|de|Ludwig Wilhelm Erhard}}, [[1897년]] [[2월 4일]] ~ [[1977년]] [[5월 5일]])는 [[독일]]의 정치인, 경제학자이다.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 아래에서 경제장관을 지내면서 독일의 부흥을 이루었고, 2대 [[독일의 총리연방수상|총리연방수상]](1963~66)를 역임했지만 아데나워와의 당내 권력싸움에서 밀려 총리로서는수상으로서는 단명했다.
 
== 생애와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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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시장경제 (라인 강의 기적) ===
[[파일:Bundesarchiv B 145 Bild-F004214-0033, Konrad Adenauer und Ludwig Erhard.jpg|thumb|left|[[콘라드 아데나워|아데나워]] 총리와수상과 에르하르트]]
[[1949년]]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의 경제장관으로서 독일의 전후 경제 개혁과 경제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다음 세월 동안에 "사회적 시장경제"를 채택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른바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독일의 [[철학자]]인 [[발터 오이켄]]이 최초로 주창한 이 사상은 시장경제에 따른 자유경쟁을 지향하지만, 사회적 질서의 형성 및 유지에 있어서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기초를 둔 에르하르트의 체계는 [[주택]], [[농업]], [[사회]] 계획들을 위한 특별 설비들을 포함하였다.
 
== 총리수상 재임 ==
[[1957년]] 연방[[독일의 정부의 부총리에부수상|부수상]]에 임명되었고, [[아데나워]] 총리가수상이 [[1963년]] [[10월]]에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총리수상 자리에 올랐다.
 
에르하르트의 정부는 미온적인 외교 관계들과 예산 부족에 의하여 위기에 처해졌다. [[1966년]] 여름에 근소한 불경기의 책임에 [[세금]]을 상승하기로 결정하자, 내각의 장관들이 탈퇴하는 원인을 가져왔으며, 그해 말에 그는 사임하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