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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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의 광복으로 경성제국대학이라는 교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8월 16일]]에는 조선인 직원들이 ‘경성대학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학생들과 함께 야마가 노부지 총장에게 학교의 운영에 대한 전권을 얻어내었다. 같은날, 대학의 교원과 학생들이 조선산업건설협의회를 결성하고 조선의 과학진흥과 산업재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협의회는 당시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경성대학 경제학부 교수였던 박극채가 주도하여 결성된 것으로 후에 조선과학자동맹으로 발전하였다.
 
[[8월 17일]]에는 학교 본관에 태극기를 계양하고게양하고, 경성제국대학 현판의 ‘제국’이라는 글씨를 종이로 가려서 경성대학으로 보이게 하였다. 하지만, [[8월 20일]] 일본 군부대가 법문학부 교사에 임시 주둔하게 되면서 자치위원회의 활동은 중단되게 되었다. [[8월 22일]] 친일인사인 [[백낙준]]이 법문학부 학부장, 경제학부 학부장 겸임으로 부임하여 사실상의 총장이 되었다. 이에 자치위원회와 학생들은 백낙준과 학무당국에 항의서를 제출하였으나, 이들의 의사는 묵살되었다<ref>우리는 조선에 다녀왔다, A.키토비차,B 볼소프, 글누림, 195-196페이지.</ref>.
 
[[9월 8일]]에 미군이 경성대학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법문학부와 의학부 교사를 숙소로, 이공학부를 야전병원으로, 도서관을 미군 사령부로 전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들이 유실되었고 이공학부 교사에 설치되어있던 많은 과학설비들이 파손되었다. 미군이 경성대학 교지를 점령 사용하면서 경성대학은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사로 이전하여 대학행정과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 백낙준의 횡포로 인해 많은 교수와 강사가 경성대학을 떠났으며<ref>상동, 196페이지.</ref>, 백낙준은 일제 강점기 시기 경성제국대학에 재학했으나, 일본군 입대로 인해 학위를 얻지 못한 젊은이들을 교수와 강사로 채용하였다<ref>상동, 196페이지</ref><ref>조선일보, 1945년 9월 5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