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토론 | 기여)
잔글 →‎생애: 보관장
(토론 | 기여)
잔글 +연도
16번째 줄:
! colspan="2" style="background:khaki" | 대표작
|-
| style="width:10080%;" | 〈'''애수의 소야곡'''〉
| style="width:20%;" | [[1937년]]
|-
| 〈'''비 내리는 고모령'''〉
|-
| 〈'''가거라 삼팔선'''〉
|[[1946년]]
|-
| 〈'''비 내리는 고모령'''〉
|[[1948년]]
|-
| 〈'''신라의 달밤'''〉
|[[1948년]]
|-
| 〈'''낭랑 십팔세'''〉
|[[1949년]]
|-
| 〈'''굳세어라 금순아'''〉
|[[1953년]]
|-
| 〈'''이별의 부산정거장'''〉
|[[1954년]]
|}
'''박시춘'''(朴是春, [[1913년]] ~ [[1996년]] [[6월 30일]]<ref>{{뉴스 인용
줄 47 ⟶ 56:
}}</ref>
 
이후 〈낭랑 십팔세〉,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비 내리는 고모령]]〉, 〈낭랑 십팔세〉,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자라〉,〈[[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 서울〉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박시춘은 작곡에 대해 매우 진지하여 전주와 간주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약 3천여 곡의 노래와 악상을 남겼으며, 이런 업적으로 박시춘의 등장 자체가 대중가요의 새 장을 열었으며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지원병으로 참전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내용의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목단강 편지〉 등의 친일 가요를 작곡한 바 있다.<ref>{{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