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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량'''(南涼 [[397년]]~[[414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 독발부(禿髪部)의 [[독발오고]]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남량의 독발씨는 탁발씨(拓跋氏)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이 나라을나라를 탁발량국(拓跋涼国)이라고도 칭한다.
 
== 역사 ==
독발부는 [[전량]]과 [[후량 (십육국)|후량]]의 싸움에서 전량측에 섰다가 대패하여 세력을 잃었다. 족장 독발사복건은 실의속에 죽고, 그의 아들 독발오고가 부족을 이끌고 후량에 복속해 부족을 재건하면서 394년 [[여광]]으로부터 가절(仮節)-관군대장군(冠軍大将軍)-하서선비대도통(河西鮮卑大都統)에 배정받고, 광무현후(広武県侯)에 봉해졌다. 395년 독발은 광무에서 청해(靑海)의 황수(湟水)유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선비족 을불부(乙弗部), 절굴부(折掘部) 복속시켜 이땅에 거점을 옮겼다. 396년 여광이 대량천왕에 즉위하자 독발오고는 이에 반발해 후량의 관직을 받지않고, 자립할 준비에 나섰다.
 
=== 남량의 성립 ===
397년 1월 독발오고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서평왕을 자칭하고 겸천보(廉川堡) 수도로 삼고, 건원하여 태초원년(太初元年)이라고 했다. 역사가는 이것을 가리켜 남량의 성립이라고 보았다. 6월에 후량 내부의 건강군(建康郡)에서 [[단업]]이 [[저거몽손]]에게 옹립되어 [[북량]]이 건국되었고, 8월에는 후량의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구(郭口)가 반란을 일으켜 후량은 내란상태에 빠졌다. 이 상황 속에서 남량은 북량-서진-곽구와 손을 잡고 후량 포위망의 중심이 되었다. 398년 곽구는 저족(氐族)의 양궤(楊軌) 옹립하고 후량에 저항했으나 후량의 반격에 의해 고장에서 물러나 독발오고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독발오고는 이에 응하여 후량군을 격파한 뒤 황수유역의 강유양 (羌酋梁飢)을 멸망시켜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저족의 양궤을양궤를 복속시킨 12월에 무위왕(武威王)으로 개칭했다. 399년 독발오고는 수도을수도를 낙도(樂都;현재 청해성 낙도현)으로 옮기고 후량에 대해 호각을 이루는 군사을군사를 전개했으나 6월 낙마하여 중태에 빠져, 동생 [[독발이녹고]](禿髪利鹿孤)에게 후사을뒷일을 맡기고 사망했다.
 
399년 8월 이녹고는 무위왕을 칭하고 서평으로 수도를 유래되었다. 구단은 서평에서 낙도로 수도를 옮기고, 이곳을 새롭게 증축하여 왕도로써의 위용을 정비하였다. 10월 남량에 몸을 의탁한 옛 서진의 태자 [[걸복직반]]이 도망치자, 구단은 그의 처자도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403년 8월 후량은 연이어 수도 고장을 남량과 북량에게 공격받아 더이상 정권으로써 존재가 불가능하게 되어, 기어코 고장성을 후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하서의 세력권은 크게 변동하여 404년 구단은 자신의 연호을연호를 폐지하고, 후진의 연호을연호를 받들어 후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것을맹세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한편 구단은 융성하던 북량을 공격해 하서 중서부로도 세력을 확장해 후진의 고장에도 강한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후진은 고장을 유지하지 않고, 406년 6월 구단에게 사지절(使持節)-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거기대장군(車騎大将軍)-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将)-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하여 고장의 영유을영유를 인정하였다. 11월 구단은 낙도에서 고장으로 천도하여 한명의 병사손실 없이 하서 동부을동부를 세력하에세력 하에 넣었다. 또한 구단은 북량에 대항하던 [[서량]]과 동맹을 맺어 이로써 남량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남량의 쇠퇴 ===
407년 남량은 빠르게도 쇠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8월 독발구단은 황수지구, 하서지구등 전영역에서 병사을병사를 총동원하여 5만의 병력을 모아 직접 군사을군사를 이끌고 북량을 공격했다. 그러나 구단은 숫적으로 뒤지던 북량의 [[저거몽손]]에게 균석(均石)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역으로 일근군(日勒郡), 서군(西郡)을 잃었다. 11월 이번에는 오르도스을오르도스를 석권한 [[하 (오호십육국)|하]]의 [[혁련발발]]이 멀리 원정하여 2만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광무군에 침입하여 대대적으로 약탈을 한뒤 철수했다. 구단은 하나라군을 추격하여 양무에서 전투을전투를 벌였으나 혁련발발의 반격에 의해 전군이 괴멸하고 구단은 목숨만을 건져 고장으로 패주했다.
 
이때 고장성내에서는 북성에서 흉노계의 객( 객)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직후 이번에는 남량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408년 5월 후진은 남량에게 고장을 넘겨준것을넘겨준 것을 후회하고,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구단은 고장에서 농성하여 2번에 걸쳐 후진군을 물리쳤으나, 이때 성내에서 후진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차례로 나타나는등 서서히 구심력이 저하되면서 국력의 피로을피로를 초래했다.
 
409년 독발구단은 국내의 동요을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북량 원정에 나서, 북량의 저거씨의 출신지였던 임송군(臨松郡)까지 쳐들어가 이곳을 약탈했으나 돌아오던 도중 역습을 당해 대패했다. 410년 정월 구단은 다시 북량을 공격했다가 패하고 3월 기병 5만을 이끌고 북량군과 궁천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이마저도 대패해, 오히려 북량군이 공세에 나서 수도 고장을 포위당했다. 고장성안은 큰 혼란에 빠져 묵굴부, 맥전부, 거개부등의 하서 선비의 원종이 차례로 배신하고 북량군에 항복했다. 구단은 항전을 포기하고 일족인 독발경귀(禿髪敬帰)와 아들 독발지(禿髪他) 인질로 내놓고 북량군과 강화했다.
 
그해 남량의 황수지구에서 절굴기진(折堀奇鎮)이 반란을 일으켜 남량의 토벌군은 이들에게 대패했다. 구단은 북량의 압박과 황하(湟河)유역의 상실을 두려워해 곧이어 고장에서 낙도로 수도를 옮겼다. 구단이 고장을 떠난 직후, 초랑(焦朗)이 고장에서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을양주자사를 자칭했다. 이로써 남량의 하서지역의 거점이던 고장은 판도에서 떨어져 나가고, 남량의 하서진출도 좌절되게 되었다.
 
=== 남량의 멸망 ===
411년에 들어서 남량을 둘러싼 정세는 시시각각 악화되어 갔다. 1월 북량은 고장을 공격해 함락시켜 하서을하서를 통일하고 그대로 남하하여 수도 낙도을낙도를 포위했다. 이 기회을기회를 틈타 남쪽에서는 [[토번]]이 요하군(澆河郡;현재의 청해성 귀덕현)을 공격해 빼앗았다. 또 동쪽에서는 409년 재흥한 [[서진]]이 그해 걸복직반을 대장으로 남량에 공격해 들어와 홍지영남(洪池嶺南)지방을 약탈했다. 2월 독발구단은 아들 독발안주(禿髪安周) 인질로 보내 북량군을 물러가게 하고, 역으로 군대를 다섯 길로 나눠 북량에 침공해 들어갔다. 그러나 구단은 북량군에게 대패하고 그대로 다시 낙도을낙도를 포위 포위당했다당했다. 구단은 아들 독발염간(禿髪染干)을 인질로 내보내 북량군을 퇴각시켰다. 이때 남량의 약세는 두드러져서 겨우 황하유역의 5군(서평, 낙도, 황하, 진흥, 광무)의 땅만을 보전하고 있었다.
 
413년 독발구단은 2번에 걸쳐 북량에 공격했으나 약후 와 약량에서 또 대패하고 황하군을 잃고 수도 낙도을낙도를 포위당했다포위 당했다. 구단은 이번에도 공격을 견디고, 동생 독발구연을 인질로 내보내 북량군을 퇴각시켰다. 414년 4월 독발구단은 붕괴일보직전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에 배반했던 청해호 부근의 결간부, 을불부에 대해 직접 기병 7천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이 기회을기회를 틈타 서진의 걸복직반이 낙도에 공격해 들어와 역으로 남량의 수도 낙도는 함락되었다. 남량 지배하의 3군도 모두 서진에게 항복하여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원정군도 6월에 서진에 항복했다. 이로써 남량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해 독발구단은 독살당했다.
 
남량은 3대 18년에 멸망한 단명한 지방정권이었지만,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거점을 청해성지구에 두었고, 이 땅의 개발에 나서서 이후 청해 실크로드의 개통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남량 정권하에서는 법현이 이 길을 중간까지 이용하였다. 독발씨에 대해서는 독발파강(구단의 아들)이 북위에 항복할때 탁발씨와 같은 씨족이었기에 원씨을원씨를 내려주고, 일족을 매우 중용하였다. 한편 독발구단의 동생 독발변니는 남량 멸망후 남하하여 티베트로 도망쳐 토번을 건국했다는 전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