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196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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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金永煥''', [[1963년]] ~ )은 대한민국의 운동권 인사이다인사다. [[1986년]] [[서울대학교]]에서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주체사상|김일성 주체사상]]을 80년대 학생 운동권에[[학생운동]]권에 전파했다. '강철서신'의 저자로 유명하다. 김영환은 [[199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밀입북해밀입국해 주석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면담했지만,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고됐다고 주장하면서 전향한 뒤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탈북자 운동가가 된다.
 
[[2012년]] 북-중朝中 국경근처에서국경 중국근처에서 공안당국에중화인민공화국 체포되었다가,공안 구금당국에 체포됐다가 구금된 지 114일 만에 석방되었다석방됐다. [[2012년]] [[7월 25일]] 김영환은 기자기자회견을 회견을열고 열고,중화인민공화국 중국내 구치소에 구금됐을 당시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주장했다.<ref name="cbc120726">[http://www.cbci.co.kr/sub_read.html?uid=179859 김영환 “中 구금 당시 가혹행위가혹 행위 있었다” 주장, 정부 부적절 대응 논란], CBC뉴스 홍성완 기자 홍성완, 2012년 07월 26일</ref>
 
==구국학생연맹 활동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 ==
1986년 설립된 구국구국학생연맹은 학생대한민국 연맹은 한국 학생 운동사에서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평가받는다. 그는김영환은 1985년 말 필명 '강철'이라는 필명으로부제를 '한 노동 운동가가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라고 단 편지 형태의형태로 글로 주체사상에글로 대하여주체사상을 알기 쉽게 소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51594 김영환은 누구인가], 연합뉴스, 1999년 9월 9일</ref>
 
[[199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제공한 [[반잠수정]]을 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밀리에 방문했을 때 [[주체사상]] 학자들과의 토론회를 요구하여,요구해 [[황장엽]]의 제자들인 당시 40대의40代 학자들과 장시간에 걸친걸쳐 토론을 가졌다고 한다토론했다.<ref name="chosun101010">[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10/2010101001276.html (시론) 주사파였던 제가 황 선생을 보내며], 조선일보 칼럼, 김영환 계간시대정신 편집의원, 2010년 10월 10일</ref> 김영환은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그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답하지 못했다."라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라고 주장했다.<ref name="chosun101010" />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을 두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면서 "오히려 그가그 사람이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는 지 의심스러웠다."라고 주장했다.<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43037 강철 김영환, "나를 꺾은건 고문 아닌 北현실"], 데일리 NK, 2007년 06월 27일</ref>
 
== 인권 운동과 중국에서의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체포·구금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 운동가로 변신한 김영환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보당국에정보 체포되어당국에 구금되었다가체포돼 풀려난바구금됐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특히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공안 당국은 김영환김영환을 위시한 한국인대한민국 4명에국적의 대해사람 국가4명에게 안전 위해죄를국가안전위해죄를 적용해, 북중조중 접경지역인접경지대인 [[단둥 시]]의 한 수감시설에수감 시설에 구금했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러 인권단체들은인권단체는 "'김영환의 체포는 중국과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위부의 합작품"'이라고 주장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17/2012051700229.html 전향 후 北인권 위해 싸우는 김영환… 北엔 눈엣가시], 조선일보 기자 전현석·이옥진 기자, 2012년 05월 17일</ref>
 
[[2012년]] [[6월 20일]]에 김영환과 구금된 4명의 가족 대표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후진타오]]에게 석방 청원서를 보냈다.<ref>[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6/21/8153030.html?cloc=olink|article|default "김영환 석방" 후진타오에 청원서], 중앙일보 기자 김수정·최형규 기자, 2012년 06월 21일</ref>
구금된 지 114일 만에 풀려난 김영환은 [[2012년]] [[7월 25일]] 기자 회견을기자회견을 열고, 중국중호인민공화국 내 구치소에 구금됐을 당시 조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ref name="cbc120726" />
 
== 김영환 이후의 주사파 ==
김영환,김영환과 [[하태경]] 등의위시한 일부 주사파들은주사파는 주체사상의 허상을 느끼고 주체사상을 이상 주체사상을더는 따르지 않고 있으나않으나<ref name="경향120518">[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182157205 김영환·이석기, 82학번 주사파의 '엇갈린 30년'], 경향신문 안홍욱 기자 안홍욱, 2012년 05월 18일</ref>, [[하영옥]]과 [[이석기 (1962년)|이석기]] 등은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복역후복역 출소후에도후 출소 후에도 계속 활동하고활동한다고 있다는주장하는 주장이사람이 있다.<ref name="chosun120518">[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18/2012051800202.html 이석기, 김영환(강철서신·민혁당 창당 주역) 전향 후에도 지하활동], 조선일보 최재혁 기자, 2012년 05월 18일</ref><ref>[http://news.donga.com/3/all/20120509/46100595/1 통합진보 당권파 vs 비당권파 전면전,“이석기 배후엔 민혁당이?…설마 北지령을?”], 동아일보 윤완준 기자 윤완준, 2012년 05월 09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334740 정보당국 "하영옥씨 행적 살피고 있다"], 동아일보 윤완준 기자, 2012년 5월 12일</ref>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석기 (1962년)|이석기]]는 당권파가 뿌리를 둔 소위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이다. 그는이석기는 1990년대 후반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한 민혁당의 당원이었다민혁당원이었다. 경기동부연합의 '돈줄'로 알려져 있는 이석기는 2005년 2월 정치 컨설팅, 홍보 기획 등을 업종으로 하는 'CNP전략그룹'을 만들었다.<ref name="chosun120518"/> [[2014년]] [[2월 17일]], [[이석기 (1962년)|이석기]]는 1심에서 내란 선동·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인정돼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으며, 2014년 8월 11일 항소심에서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 내란선동 혐의는 유죄로 징역 9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2015년 1월 22일 대법원은 항소심처럼 이석기 국회의원 의원에이석기에 대해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 내란선동 혐의는 인정해 징역 9년을 확정했다.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