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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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rince Klemens Lothar von Metternich-Winneburg.jpg|thumb|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 추 바일슈타인 후작'''({{llang|de|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 [[1773년]] [[5월 15일]] - [[1859년]] [[6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당대의 가장 중요한 외교가였다.
 
명문 귀족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마인츠]]에서 공부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는 아버지를 도와 혁명을 막는 데 힘썼다. 1803년 드레스덴 주재 공사를 거쳐, [[프랑스]] 대사가 되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프랑스 제1제국|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자 유럽 문제를 논의하는 [[빈 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정통주의를 제창하고, 나폴레옹이 파괴한 유럽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주로 논의했다. 이때 능숙한 외교 정책으로 오스트리아의 위신을 회복시켰다. [[빈 체제]]의 목적은 프랑스 혁명 즉, 나폴레옹의 전성기 이전의 상태로 유럽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력 반대하여 철저한 보수 정치에 의한 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는 영내에 다수의 이민족이 사는 복합국가였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의 침투와 제휴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국내에 대두할 때 국내의 분열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독일의 통일을 열망하는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통일 운동의 지도권을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에 빼앗기지 않고 [[대독일주의|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을 실현하고자 [[독일 연방]]을 조직, 이를 주도하려 했다.<ref>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빈 체제#메테르니히|메테르니히]]〉 "Klemens Wenzel Lothar Metternich (1773 1859) 오스트리아의 재상. 빈 회의에서 정통주의를 제창하고 시종 회의를 리드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력 반대하여 철저한 보수 정치에 의한 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는 영내에 다수의 이민족이 사는 복합국가였다. 따라서 자유주의의 침투와 제휴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국내에 대두할 때 국내의 분열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독일의 통일을 열망하는 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에 통일 운동의 지도권을 프로이센에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중심인 통일을 획책하고 독일연방을 조직, 이를 리드하려 했다."</ref>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4국의 동맹을 결성했다. 동시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