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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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편찬된 《인천부읍지》에서 인천에 속한 면으로는 부내면, 먼우금면, 다소면, 주안면, 남촌면, 조동면, 신현면, 황등천면, 전반면, 이포면 등을 기재하고 있다. 당시 부평과 강화, 교동 등은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다.<ref>《[http://www.incheon.go.kr/ebook/pdf/2004_12_3.pdf 역주 인천부읍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4년</ref>
 
해양방어의 요충지인 강화도는 1627년 정묘호란을 계기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강화부는 청나라가 침공했을 경우 국왕과 신하들이 피난할 수 있는 보장처로 여겨졌고 인조 대부터 강화 유수부를 중심으로 인근 교동도 및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의 연안 지역이 군병과 군량을 지원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중앙정부는 세원의 일부를 강화부로 이전하여 군향(軍餉, 군량과 무기 등 군사자원)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피난처로서 관리되던 강화도는 18세기 이후 이양선의 출몰에 따라 도성을 방어하는 해방처(海防處)로 재편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임무가 변화하자 오히려 강화도의 군향이 부족한 중앙재원으로 전용되기 시작하였다. 강화도의 재정 규모는 숙종 20년(1694년) 16-17만석이었으나 영조 44년(1768년)에는 3만 8천여석으로 급감하였다. 고종대에 이르러서는 강화유수부와 부평도호부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진무영이 군사적인 기능을 크게 상실하기에 이르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조낙영 외|2009년|pages=8-9}}</ref> 18세기 이전에는 삼남지역의 군작미(軍作米)와 [[대동법|대동미]] 가운데 일부가 강화도의 군향으로 지원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군향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조낙영 외|2009년|page=50}}</ref>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강화도 경비를 위한 세금인 심도포량미를 신설하고 진무영에 월급을 받는 상비군 3천명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한 이후 고종은 진무영보다는 국왕친위부대인 무위소를 중시하여 진무영의 병사를 다시 1,300 여명으로 축소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조낙영 외|2009년|page=14}}</ref>
 
강화도는 왕실의 재정운영에도 중요하였는데 강화도에서는 일찍부터 왕실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궁방전(宮房田)이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전부터 1907년 궁방전이 폐지될 당시 강화도에 존속하던 궁방전은 8곳으로 1사7궁이라 불렸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조낙영 외|2009년|pages=166-167}} - 1사 7궁은 내유사, 명례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육상궁, 선희궁, 경우궁 이다.</ref> 궁방전은 왕실 일족의 개인 또는 가계의 재정을 위해 설치하여 군, 대군, 공주, 옹주 등의 생활물자 공급을 담당하였고, 사친(私親)의 제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조낙영 외|2009년|page=168}}</ref> 예를 들어 [[육상궁]]은 정궁(正宮) 출신이 아닌 군주의 사친을 위한 사당이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490000,11 서울 육상궁], 문화재청</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