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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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981년 미국 워싱턴 방문 당시
|크기 = 300px
|국가 =
|대수 = 11·12
|취임일 = [[1980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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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대한민국 육군|육군본부]] [[보안사령부|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대한민국 국방부|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1981년]] [[3월]] 역시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에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 취임까지 재직하였다. 1989년 12월 31일 13대 국회의 증언대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 이라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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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와 비판 ==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극과 극이며 그의 평가는 대한민국의 극우주의와 진보주의 및 보수주의를 가르는 척도 중의 하나로 통용되기도 한다. 광주민주화운동 학살자, 군부 독재자라는 혹평에서부터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전두환에 대한 시각이 보수주의 내부에서도 전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대다수 보수 세력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 중 일어난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를 비롯한 불법적인 집권 과정,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과 전두환 대통령이 세운 제5공화국 정권이 민주주의 및 인권 탄압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비판적이다
=== 인물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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