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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사의 역사 ==
보성사는 1906년 대한제국 말기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용익]]이 러시아어학교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학교 교재 출판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하여 1910년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최린이 보성고보의 교장을, [[이종일 (1858년)|이종일]]이 보성사 사장을 맡았다. 그 후 중앙교당의 인쇄소인 창신사와 병합하여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 30평 정도의 2층 기와 벽돌집으로 우리나라한국 최초의 인쇄소였다.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교회 서적 및 학교 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 출판 문화 향항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보성사는 8면 활판기 등을 독일에서 수입하고 석판 인쇄시설까지 갖춰 당시 한국인 인쇄소로서는 시설이 가장 좋았다. 
[[파일:보성사 3.1운동.jpg|섬네일|3.1운동을 표현하는 조각이다.]]
 
== 보성사와 독립선언서 ==
<ref>{{저널 인용|제목=삼일본문개정판-ok-001-232 - 삼일문화재단|저널=|성=|이름=|url=http://www.31cf.or.kr/common/dn.asp?fn=31movement_2016.pdf|날짜=|출판사=}}</ref>3.1운동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같은 달 27일,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과 함께 극비리에 총 2만 1000매의 독립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하였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서면자들의 연고지인 서울, 평양, 청주, 용강, 해주, 선천, 원산, 의주 등지로 철도편을 통해 전달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독립선언서가 배달되었고 곳곳에 격문이 붙었다. 별도로 천도교 측의 임규는 27일 일본에 보내는 통고서를 가지고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 일본 동경에 도착한 후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렇게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통해 예정된 대로 [[3․1운동|3.1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성사는 1919년 일본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천도교라는 종교적 이름을 앞세워 일본의 눈을 피해 인쇄소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이처럼 3.1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반포한 점에 있어 보성사는 독립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ref>{{저널 인용|제목=삼일본문개정판-ok-001-232 - 삼일문화재단|저널=|성=|이름=|url=http://www.31cf.or.kr/common/dn.asp?fn=31movement_2016.pdf|날짜=|출판사=}}</ref>
 
== 보성사와 조선독립신문 ==
<ref>{{웹 인용|url=http://chondobs.or.kr/bbs/zboard.php?id=shiilbo&page=1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1|제목=천도교 부산시교구|확인날짜=2017-05-23}}</ref>보성사의 사장 이종일은 3월 1일 만세 운동이 터지면 자신이 구금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전 2월 28일 이종린으로 하여금 창간호의 원고를 집필하도록 하였다. 보성사에서 김홍규 감독에게 독립신문 1만 5천 부를 인쇄하여 3월 1일 배부케 하였다. 이렇게 해서 독립선언에 호응하여 궐기할 것을 촉구한 <[[조선독립신문]]> 제 1호가 극비리에 간행될 수 있었다. 당일 오후 6시에 발행인 윤익선은 체포되었고 이에 창간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린은 독립신문을 프린트 판으로 계속 발행하기로 하였다. [[이종린 (1883년)|이종린]]은 3월 2일 장종건에게 간행비 20원을 전하였고 그에 따라 이종린은 독립신문 제 2호부터 4호까지 발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3월 10일 원고와 등사 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그 후 독립신문은 천도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장종건의 주도 하에 장소를 옮겨다니며 계속 발행되었으며 3월 25일 장종건 등이 체포된 후에도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6월 22일 제 36호와 8월 29일 국치기념호까지 간헐적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 발행 후 경향 각지에는 이에 고무되어 <신조선신문>, <조선민보>, <국민신보>, <혁신공보> 등이 연달아 간행되어 독립 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chondobs.or.kr/bbs/zboard.php?id=shiilbo&page=1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1|제목=천도교 부산시교구|확인날짜=2017-05-23}}</ref>
 
== 위기 ==
<ref>{{뉴스 인용|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6670&cid=46623&categoryId=46623|제목=보성사|언어=ko|확인날짜=2017-05-23}}</ref>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일본에 협력하던 순사 신승희가 그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5500원을 주며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하지만 인쇄가 끝난 후 선언서를 옮기던 도중 일본 경찰의 검문이라는 또 한번의 위기와 마주쳤다. 때마침 정전으로 불이 꺼져 있어 이종일 등이 단순히 인쇄된 족보일 뿐이라고 경찰을 속여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옮겼다. 이렇게 독립선언서는 무사히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고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분출한 3.1운동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 후 신승희는 비밀이 탄로되어 5월 헌병대에 체포되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자결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6670&cid=46623&categoryId=46623|제목=보성사|언어=ko|확인날짜=2017-05-23}}</ref>
[[파일:보성사 터.jpg|섬네일|현재 남아 있는 보성사의 터이다.]]
 
== 일제의 방화와 현재 ==
<ref>{{뉴스 인용|url=http://mpva.tistory.com/1836|제목=지하철을 따라서 알아보는 호국보훈 제1편-3호선 안국역–보성사 터|날짜=2012-07-27|뉴스=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확인날짜=2017-05-23}}</ref>1919년 2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후 보성사는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는 조선독립신문을 계속 발행하였다. 그 결과 일본 경찰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고, 같은 해 6월 불을 질러 건물을 전소시켰다. 그로 인해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문서를 쉼없이 찍어내던 보성사는 현재 그 터만 남아 오늘날에 전하게 된다.<ref>{{뉴스 인용|url=http://mpva.tistory.com/1836|제목=지하철을 따라서 알아보는 호국보훈 제1편-3호선 안국역–보성사 터|날짜=2012-07-27|뉴스=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확인날짜=2017-05-23}}</ref>
 
== 참고 자료와 그 출처 ==
<referen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