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문익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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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파일:DaewooFoundBd080211.jpg|thumb|[[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에 있는 이덕형의 옛 집터]]
 
=== 출생과 유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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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8월]] 그의 처남 이경전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지 않았으므로 장인 이산해가 크게 노하였는데, 이때 장인 이산해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아뢰게 하여 이경전이 마침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ref>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8월 10일(임인) 1번째기사 "간원이 독서당 간택을 다시 할 것을 청하다"</ref>
 
=== 임진왜란 전후 ===
{{참고|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을 때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실패,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1593년]]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을 수행하였고,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특히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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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선조 32년) 윤 [[4월 9일]] 중국 명나라의 장수 유제독(劉提督) 휘하의 항왜가 독약을 잘 만들자, 이덕형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도감의 초료를 내서 항왜 사야여문(使也汝文) 등에게 주어 항왜를 꾀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항왜가 [[황해도]] [[평산군]]에 이르러 달아나자 제독이 크게 노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잡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선전관]] [[이괄]]을 보내 계략으로 잡아 참수하게 하고 그 머리를 보내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투항한 항왜를 죽였다는 이유로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나 겨우 무마되었다. [[1599년]] 겸문학(兼文學), 그해 [[12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으며, [[1600년]] [[1월]]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곧 [[도원수]]를 겸하였으며,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 [[1601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 중의 공신을 책봉할때 [[호성공신]], [[선무공신]]에 모두 추천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08년 6월 진주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1609년 10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명나라에서 [[임해군]]의 존재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들어 [[광해군]]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되돌아왔다. 1611년 8월 좌의정, 1612년 11월 영의정이 되었다.
 
=== 광해군 정권과의 갈등과 은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