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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제23대 국왕]]
|자녀=2남 2녀</br>장남 : [[문효세자]](의빈 성씨 소생)</br>차남 : [[순조]](수빈 박씨 소생)</br>장녀 : [[옹주]](의빈 성씨 소생)</br>차녀 : [[숙선옹주]](수빈 박씨 소생)|왕조=[[조선]]}}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음력 9월 22일]]) ~ [[1800년]] [[8월 18일]]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성]]은 [[전주 이씨|이]](李), [[휘]]는 산(祘)<ref group="주해">祘은 算의 이자이다.([https://zh.wiktionary.org/wiki/祘|중국어 위키낱말사전 - 祘]) 그러나 전운옥편에는 省의 이자로 등재되어 있다.(해원출판사, 해원한한실용옥편, 1996년) 순조 때 이성보가 정조의 휘를 범한다는 이유로 이직보로 개명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wa_10008029_007&tabid=k 조선왕조실록 순조 1권, 즉위년(1800 경신 / 청 가경(嘉慶) 5년) 8월 29일(기묘) 7번째 기사]. 이에 대해서는 정조가 아들을 많이 낳고자 자신의 이름의 음을 성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다. {{뉴스 인용 |제목 = "정조, 아들 많이 낳으려 이름 바꿨다" |url =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0/10/03/0901000000AKR20101003051200005.HTML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김태식 기자 |날짜 = 2010-10-04 |확인일자 = 2010-11-14}}</ref>,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 (이름)|자]]는 형운(亨運)<ref>[[#정조실록 (1805)|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y.go.kr/id/kva_000 1권, 총서]</ref>, [[호 (이름)|호]]는 홍재(弘齋)이다.{{sfn|이이화 (2004)|p=351}}
11세 때 아버지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반남 박씨 박수종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이들 명문가 집안 중에 소외되어 있던 진보적이고 독특한 [[박지원 (실학자)|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또한 지배적이였던 [[서인]](소론 벽파)의 스승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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