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 (1905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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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출생일|1905|7|29}}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사망일 = {{사망일과 만나이나이|1985|1|27|1905|7|29}}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국적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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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부산제이공립상업학교]] 졸업
|본관 = [[김해 김씨|김해]](金海)
|직업 = [[기업인]]<br/>[[외교관]]</br />[[정치인]]
|종교 = [[불교]]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바오로)
|배우자 = 강정순(사별), 강신팔(사별), 방연숙(삼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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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일제강점기<small><ref>{{뉴스 인용|성1=박중석|제목=김무성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url=http://newstapa.org/28780|날짜=2015-9-17|확인날짜=2015-11-30|출판사=뉴스타파}}</ref></small> ===
* 1923년 [[조선식산은행]]<ref>조선식산은행 : 1918년 설립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ref> 본점 취직, 6개월 만에 포항지점으로 전출. 경북 영일군 포항읍 이주 정착.
* 1924년‘영일청년회’ 지육부장, 독서회 조직 및 노동야학 개설. 이후 교사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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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친일파 [[김갑순]]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신문사]]에서 발행한 “광영록”에 김용주 수록
* 1941년 9월 [[일본동맹통신사]]에서 발행한 “흥아일본건국사”에 김용주 수록
 
* 1941년 5월 17일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ref name="국민총력">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산하 지방 조직</ref> 이사 선임
{{인용문|水産團體도 結合, 翼贊體制를 整備, 慶北聯盟 結成式 擧行(수산단체도 결합, 익찬체제를 정비, 경북연맹 결성식 거행)<ref>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5월 20일 석간 3면</ref>|매일신보 1941년 5월 20일 석간 3면}}
 
* 1941년 7월 16일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ref name="국민총력">< /ref> 평의원, 도회의원 자격으로 임명
{{인용문|1) 總力慶北聯盟, 新道議 網羅 後 最初 常會, 中心論題는 生活新體制(총력경북연맹, 신도의 망라 후 최초 상회, 중심논제는 생활신체제)<br />2) 道會議員を評議員に加へ, 慶北, 聯盟役員の常會を開へ(도회의원을 평의원으로 가입, 경북, 연맹역원의 상회를 개최)<ref>1)매일신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3면 2)경성일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2면</ref>|1)매일신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3면 2)경성일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2면}}
 
* 1941년 9월 이전 대구국체명징관<ref name="국체명징관">< /ref> 1천원 헌납, 대구신사 2천원 헌납<ref>日本同盟通信社, 1941.9, 330~332쪽 (皇統[皇紀]二千六百年記念誌)興亞日本建國史 ; 朝鮮銃後奉公錄</ref>
 
* 1941년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ref>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 일제가 침략전쟁을 진행하면서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조선인 민간조직</ref> 발기인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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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이사 : [[서병조]](중추원 참의) [[문명기]](중추원 참의), [[정해붕]](중추원 참의), 김용주 등
 
* 1941년 10월 8일 ~ 10일 친일파 [[문명기]](중추원 참의)와 함께 [[영덕]]과 [[영천]] 지역에서 개로운동을 독려, [[국민개로운동]]<ref>국민개로운동 :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선인의 노동력동원을 목적으로 조선인의 근로보국을 주장하면서 실시한 운동</ref> 의 취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불노유한 무직자(不勞有閑無職者) 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전시체제와 개로체제를 확립하도록 되었다.<ref>매일신보 1941년 10월 7일 경상판 조간 3면</ref>
 
* 1941년 12월 7일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임명 및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
{{인용문|1) 臨戰報國團 慶北支部設立, 結成은 卄九日擧行(임전보국단 경북지부설립, 결성은 29일 거행)<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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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징병제 실시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정신문화를 키워온 신사(神祠)를 건립해 감사의 뜻을 발휘해야 한다”고 발언.
銃後의 戰列에 總立, 第二日 公職者大會에 滅敵의 熱火漲溢, 各議員들의 熱論(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2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맹렬히 넘치다] 각 의원들의 열론[열띤토론])
가네다 류슈(경북도회 의원)씨가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정신문화의 양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 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귀축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ref>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석간 2면</ref>|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석간 2면}}
 
* 1943년 10월 2일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해 징병독려, 천황께 귀일 등 발언,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5가지 구체적인 방안 발언, 특히 일본에 강제 징용 될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반도의 부모가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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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논란에 대한 반박 ===
;친일 행적에 대한 반박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치안유지범으로 일제에 검거되기도 했고 신간회 활동, 조선인을 위한 학교 인수, 도회의원으로 총독부에 맞선 발언 등이 수십 건 근거로 남아 있다.<ref name="서울신문1">< /ref>
 
;징병제 실시 찬양 및 전쟁 동원 선동에 대한 반박
1943년 10월 열린 전선공직자대회(매일신보 보도)에서 김용주는 “가장 급한 일은…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며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받들어 모시어질 영광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용주의 가족은 “1940년 경북도의회 재선 이후 ‘전국에 단군묘(檀君廟) 건립’ 주장을 내세우다 고초를 겪는 등 민족운동을 이어갔다”고 주장한다.<ref name="서울신문1">< /ref>
 
;일제 패망 당시 ‘살해 대상 1호’에 대한 반박
김용주의 가족은 그가 반일 행적으로 인해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포항 지역 총살 대상 1호였다고 주장한다. 조선 계엄령 발포 시 지역 내 주요 조선인 8명의 총살 지시가 일본국 사령부로부터 내려왔다는 것. 이런 내용은 지난 8월 출간된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에도 등장한다.<ref name="서울신문1">< /ref>
;;민족문제연구소의 재반박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전해 들은 얘기를 본인 회고록과 평전에 인용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일축한다.<ref name="서울신문1">< /ref>
 
;조선인을 위한 학교 인수 및 야학의 성과
평전에 따르면 김용주는 29세이던 1933년 존폐 위기에 처한 포항 영흥학교를 인수, 교장직을 겸하고 훈육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1936년 2월 8일자에는 ‘최경성 교장 등이 진력하였으나 (학교) 경영난은 최후 결정에 달하였다는데…’라고 나와 운영 시기가 엇갈린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이며, 일본어도 가르친 야학을 애국야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조선어 금지, 신문폐간 등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당시 상황을 전혀 무시한 초보적인 지적”이라고 반박한다.<ref name="서울신문1">< /ref>
 
;비행기 헌납운동
1944년 7월 아사히신문은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광고주 명단에 김용주 이름을 올렸다. 또 1942년 2월 매일신보에 따르면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에서 군용기 헌납에 27만원을 모금했다.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일제 말기인 1940년대는 본인 의사와 관계없는 동원 기사·광고가 많이 나왔으며, 놋수저 하나까지 징발됐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한다.<ref name="서울신문1">< /ref>
 
;'변절자'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김용주가 청년기엔 민족의식을 보였고 신간회·청년단체 독서회 활동 등은 인정되지만,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부터 완전히 돌아섰다.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1926년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삼일상회 설립, 1938년 강제 면화재배 정책에 대한 국가 보상 요구 등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구국활동을 했다”고 부인하고 있다. 1940년 1월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용주가 영흥 학교에 사재 2만원을 기부하는 등 민족운동을 유추할 만한 증거들도 나온다.<ref name="서울신문1">< /ref>
 
;당시 매일신보의 신빙성
민족문제연구소는 주요 증거로 활용한 매일신보에 대해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자매지였다고 해서 사료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친일인사 1006명의 명단을 발표했을 때도 매일신보를 주요 사료로 삼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김용주의 가족은 “당시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 기고, 허위사실 수록에 대한 증언이 많아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ref name="서울신문1">< /ref>
 
;친일인명사전 등재에 대한 논박
김무성은 “연구소가 10년 동안 300만여건을 검토했다던 사전에 여태껏 등재하지 않다가 김 대표가 여당 대표가 되고 나니 태도를 바꿨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재반박
:“2009년 첫 출간 당시 자료 부족으로 해외·지방 친일반민족행위를 전면조사할 수 없었다”며 “김용주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보류했고 발간된 개정판에는 누락됐던 인사가 다수 등재될 것”이라고 답변했다.<ref name="서울신문1">< /ref>
 
=== 동명이인 ===
;애국활동 사례 22개 중 2개는 동명이인
김용주는 1931년 6월 동아일보에 ‘충무공 유적 보전을 위한 성금 일급 시전을 냈다’고 나와 있다. 또 같은 해 11월 재만피란동포 위호금품(만주 동포를 위한 성금모금)으로 일금 삼십전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기사에 충무공 성금을 낸 이는 ‘마산 거주 김용주’로 나온다. 포항에서 활동했던 김용주와 동명이인이라는 반론이다. 만주동포 성금 기부자도 ‘경성부 애우수소양소년회 김용주’로, 서울 소년단체에 김용주가 가입되었을 리 없어 서로 다른 이라는 주장이다.<ref name="서울신문1">< /ref>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