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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공왕(魯恭王) [[유여 (사람)|유여]]의 [[아들]] 욱랑후 유교(郁桹侯 劉驕)의 9대손이다.<ref>임보(林寶), 《원화성찬》(元和姓纂) 5권 고평(髙平)</ref> [[키]]는 8[[척]]에 달하고 풍모는 위엄이 있었다. [[왕창 (후한)|왕창]](王暢)에게서 [[학문]]을 사사하였다.<ref>[[사승]], 《후한서》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에서 인용</ref> [[환관]] 세력에 반발했으며 젊어서부터 [[이름]]이 나 [[팔급]] 혹은 [[팔고]] 중 한 명이었다.<ref>《후한서》67권 열전 제57 당고. 《삼국지》 유표전에서는 [[팔준]]이라 하였으나 《후한서》를 따른다.</ref> [[당고의 화]]를 당해 숨어 지냈다. 당금이 풀려서야 [[대장군]] [[하진]]의 연(掾)과 북군중후(北軍中候)를 지냈다.
 
[[190년]]([[초평]] 원년) [[형주]][[자사 (관직)|자사]] [[왕예]]가 [[장사군|장사]][[태수]] [[손견]]에게 [[살해]]당하여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소대(蘇代)가 장사에서 일어나 패우(貝羽)를 화용[[현령|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이 할거하는 바람에 장강 이남에 있는 본래 형주의 주도(州都) [[무릉군]] 한수현(漢壽縣)<ref>[[사마표]], 《[[속한지]]》(續漢志) 22권 군국 제4 형주 무릉군</ref> 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홀로 [[남군 (중국)|남군]] [[이청 시|의성]]현(宜城縣)으로 들어갔다. 남군 지역의 유력 [[호족]]인 [[채모]], [[괴월]], [[괴량]]의 조력을 얻어 궐기한 토호들의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처단하고 그 휘하 무리들을 흡수했다. 오직 장호(張虎)와 진생(陳生)만이 [[샹양 시|양양]](襄陽)성을 점거하고 버텼는데 괴월과 방계(龐季)로 하여금 설득하니 [[항복]]하여 마침내 강남 일대를 평정하였다.<ref>사마표, 《전략》(戰略)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에서 인용</ref> 양양을 주도로 정해 통치하고 [[반동탁 연합군]]에 합류하였다.
 
=== 원술 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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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평화 ===
남으로는 영릉과 계양, 북으로는 한천(漢川)을 아울러서 [[땅]]은 수천 [[리]]요, 병력은 10여 만에 이르렀다. 천하가 거세게 요동치던 때 유표는 위엄과 회유를 적절히 섞어 침착하게 통치하면서 [[형주]]를 안정시켰다. 관서, [[연주 (중국)|연주]], [[예주]]의 학사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유표는 이들을 구휼하여 [[학교]]를 세우고 [[유교|유학]]을 장려하였다. 유예(劉叡)와 [[천문]][[서적]] 《형주점》(荊州占)을 편찬하였고<ref>《[[진서]]》12권 지 제2 천문中 잡성기(雜星氣)</ref> 기모개(綦母闓) 혹은 기무개(綦毋闓)와 [[송충 (후한)|송충]] 등은 《오경장구》(五經章句)를 편찬하여 《후정》(後定)이라 하였다.
 
[[괴월]]과 종사중랑 [[한숭]](韓嵩), 별가(別駕) 유선(劉先)이 ‘[[조조]]는 명철하게 용병을 잘하며 인재도 많이 모았기 때문에 [[원소 (후한)|원소]]를 잡을 것’이라며 조조에게 귀부하자고 권하였다. 의심이 든 유표가 한숭을 조조에게 보내 그 허실을 둘러보게 하였다. 한숭이 재차 조조에게 순종할 것을 권하며 ‘자신이 사절로 가 황제에게 관직이라도 받으면 그때부터는 유표가 아닌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 하는데도 기어이 보냈다. 과연 [[시중]](侍中) 겸 영릉[[태수]]를 받고 돌아와 조조를 칭송하며 유표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자고 해서 죽이려 했지만 [[부인]] 채씨 등의 만류로 그저 가두는 것으로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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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
 
{{삼국지 중요주요 등장 인물등장인물}}
 
[[분류:142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