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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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다빈치와 마키아벨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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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1512년]] [[스페인]]의 침공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어 독서와 글을 쓰며 지냈다. 이때 그는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1513년 발표한 이 <군주론>에서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 사상은 일찍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1502년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절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만났다. 그는 당시 피렌체에서 로마냐로 파견한 외교사절로 이몰라에 있었는데 성체 설계를 위해 이곳으로 온 다빈치와 만났다. 그해 긴 겨울동안 다빈치와 마키아벨리,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후에도 다빈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513년]]에는 메디치 군주정에 대한 반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교황 레오 10세]]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코시모 루첼라이라는 공화주의파의 주도하에 이뤄진 '오리첼라리 정원의 모임'으로 알려진 피렌체 [[공화주의]]자의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로마사 논고]]는 바로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헌정되었다. 이 저작은 피렌체 공화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저작이며 로마 공화정을 비롯한 공화국들의 긍정적 역량을 최대한 조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527년]] 사망하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부활하고 1일을 살다 죽었다는 믿지 못할 전설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