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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관련된 항목에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위백의 규정 내에 한해 어느 정도 비판적 서술을 허용하자. 언제까지 엄근진스럽다고 욕만 먹을 것인가? 위백도 변화가 필요하다!'''
 
'''개성특급시'''(開城特級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의 남부에 있는 도시이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500여 년간 번영한 고도(古都)이다. 개성은 '''개경'''(開京), '''송도'''(松都), 송악(松岳), 송경(松京)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북위 38도]] 이남 지역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대한민국]] [[경기도]]의 관할에 속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괴]] 빨갱이들이 점령하게 되면서 [[1955년]] 1월부터 [[2003년]] 9월까지 [[도 (행정 구역)|도]](道)급인 '''개성직할시'''로 승격하였다가 이후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개성공업지구]]가 개성특급시에 있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19만 2,574명이다.
 
현재의 개성특급시는 [[1945년]] 해방 당시의 개성시를 중심으로 [[이북5도위원회#개풍군|개풍군]] 봉동면, 영남면, 영북면 및 중면의 동강·창내·천덕리와 [[장단군#이북5도위원회의 행정구역|장단군]] 진서면 전제·대원·어룡리 및 [[장단면]] 서장·덕산리를 합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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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개성은 북위 38도선 바로 남쪽에 있기 때문에 [[미군정]] 지역이 되고, 1949년에 개성부는 개성시가 되어 [[대한민국]]의 최접적(最接敵) 도시가 되었다. 시가지의 북쪽 [[송악산]] 정상(488고지)은 북한, 그 남쪽의 475고지는 남한이어서, 1949년 5월 4일에 [[송악산 5·4 전투]] 가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헬게이트 시작) ===
[[한국 전쟁]]으로 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빨갱이들에게 편입되었으며,점령당했으며 [[1954년]] [[10월 30일]]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55년]] [[1월]] [[개풍군]]과 [[판문군]]을 관할하는 [[도 (행정 구역)|도]](道)급인 '''개성직할시'''로 승격하였다. 이때, 고려동 일부는 분리하여 해운동(海雲洞)을 신설하였으며 수창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다. 1958년 6월 서흥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으며 덕암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보선동(步仙洞)을 신설하였다. 1959년 2월 개성시 운학리가 운학동(雲鶴洞)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3월 [[황해북도]]에 속해있던 [[장풍군]]이 개성직할시에 편입되었다.
 
[[1961년]] 3월 [[장풍군]] 내 옛 [[이북5도위원회#개풍군|개풍군 영남면·영북면]] 지역(룡흥리, 삼거리, 산성리)이 [[개성시]]에 편입되었고, 만월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송학동(松鶴洞)을 신설하였다. 1967년 10월 태평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역전동(驛前洞)을, 남안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문동(南門洞)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10월에 개성시 태평동이 내성동(內城洞)으로 개칭되었다. 1983년 11월에 개성시 손하리가 성남동(城南洞)으로, 산성리가 박연리(朴淵里)로 개칭되었고, 운학동이 운학일동(雲鶴一洞)과 운학이동(雲鶴二洞)으로 분리되었으며, 부산동 일부를 분리하여 방직동(紡織洞)을, 판문군 전재리 일부를 분리하여 개성시 은덕동(恩德洞)을 신설하였다. 1988년 7월 룡흥리가 룡흥동(龍興洞)으로 개칭되었으며, 1993년 12월 남산동이 남산일동(南山一洞)과 남산이동(南山二洞)으로 분리되었다. 1994년 3월 덕암리가 덕암동(德巖洞)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