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함 피랍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7번째 줄:
[[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이 발발한 지 1년 뒤인 1968년 1월 북한 원산 앞 공해 상에서 해양 조사선으로 위장한 미군의 정찰함 푸에블로호는 일본 큐슈에서 출발해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소련의 극동 기지를 정찰한 뒤 북한의 동해안에서 정보를 수집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정오경 원산앞바다에서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 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ref>[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22&pageFlag= 국가기록원].</ref>
 
==경과내용==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였다. 이때가 12:40분이었다. 푸에불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망을 시도하다가 3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피살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즉각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항해중인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진로를 변경시켜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토록 하였으며,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이 소련의 거부로 실패하자, 미국 측은 한국정부의 반발을 무릅쓴 채 2월 2일부터 판문점에서 북한당국과의 비밀협상에 들어갔다.<ref>[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36100000&pageNum=1&pagesize=15&cornerFlag=0&ContentTypeID=1&ProgramGroupID=0&sdate=&edate=],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ref> 결국 이 사건은 30여 차례의 비밀회담 끝에 납치된 승무원들이 325일 만인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당시 미국은 반전 여론 때문에 월남전에서 철수를 고려하고 있는 시기여서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원치 않았으므로 많은 양보를 하면서 협상하였다. 미국은 이 송환을 위해 북한에 대해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침범을 시인·사과하는 요지의 승무원석방문서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후일 미국의회에서 정치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마치 미국이 불법적으로 침략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대내외적인 선전을 펼쳐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납북사건이 발생한 31년이 지난 1999년 북한은 원산항에 있던 것을 김정일 지시에 의해 1999년 10월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 반미교육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