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 안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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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보(萬姓譜)》와 1845년 탐진안씨 족보 을사보 서문에는 탐진 안씨의 시조가 '''[[안우]]'''(安祐)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안우]]'''(安祐, ? ~ [[1362년]])는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고, 전리판서(典理判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해 의주(義州)·정주(靜州)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로서 적을 대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상원수(上元帥)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博州)·영변(寧邊)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2080 『高麗史』 卷 一百十三, 列傳 二十六]</ref>
 
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조 안원린(安元璘)은 [[고려]] [[공민왕]] 때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셋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내고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안원린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문학 등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시조 안자미(安子美)부터 [[안향]](安珦)의 증손자인 안원숭(安元崇)까지 7세가 줄곤 독자(獨子)였기 때문에 현대에 편찬된 [[신 죽산 안씨]]와 탐진 안씨의 시조 내용은 위보(僞譜)이다.<ref>{{서적 인용|저자=안재홍|제목=순흥 안가는 없다|쪽=|출판사=다락방|날짜=2009년 7월 21일|ISBN=9788978580526}}</ref> 순흥 안씨와 계보를 짜맞추기 위해 1918년에 안원린(安元璘)이라는 가공인물을 안우(安祐)의 아버지로 만들어 시조로 받들기 전까지 옛 문헌에서는 [[안우]](安祐)가 시조였다. 안도(安堵)
 
안사종(安士宗)의 아들 [[안지]](安止)가 14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찬진하였으며, 공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고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