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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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명청교체기 시기에 수탈에 가까운 규모의 조공이 있었기는 했다.그리고 명나라 초에도 말값을 주고 말을 사갔던 것으로 보인다.명사 조선전 내용 등을 보면 말을 사가는 대가로 비단 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꽤 보인다.
 
== 국가별 ==
=== 한국 ===
*[[{{See also|사대교린]]}}
 
[[한국]]의 역대 조정은 중국 왕조와의 분쟁을 미리 막고 실리 목적으로 조공을 했지만, 중국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녀]]는 대표적인 진상품 중 하나였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이는 [[조선 태종|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태종 때의 처녀 조송은 40명이었지만 [[조선 세종|조선 세종]] 12년까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공녀는 74명이었다.
 
 
다만 명사 조선전 내용을 살펴보면 공마 3천필이 요동에 도착하자 15,000필의 견포 즉 비단과 포목을 하사하여 값을 치루어 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23r_0010_0010_0260 ] 심지어 해당 기록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말값 15,000필의 비단과 포목은 언급이 없다고 하지만 명실록에는 나와있다고 주석까지 달려있다.</ref> 또한 1393년 명사 조선전의 기록을 보면 공마 9,800필을 조선측에서 진상하자 명측에서 1만 9,700필의 모시와 면포를 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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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
{{See also|견당사|일본 국왕|감합무역}}
 
일본 최초의 조공은 후한대에 이르러 시작되었으며, [[239년]] [[야마타이코쿠|야마타이왕조]]의 여왕인 [[히미코]]가 [[위나라|위]]에 조공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413년]]부터 [[502년]]까지 [[왜]]의 [[왜5왕|5왕]]이 중국 남조에 조공을 바치고 관직을 받았다. [[난보쿠초 시대]]에 [[아시카가 요시미쓰]] 등은 명나라에 조공을 올리고 ''[[일본 국왕]]''에 책봉되었다.
 
=== 베트남 ===
{{See also|안남 국왕}}
 
[[베트남]]의 역대 왕조도 분쟁을 막고 실리를 위해 중국 왕조에 조공을 하였다. 일방적으로 중국이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조공을 받은 경우도 있다. [[981년]] [[전 레 왕조]]가 [[참파]]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았고, [[리 왕조]]도 활발히 영토를 넒혀 여러 부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1807년]]에 [[진랍]]이 [[사이암]]에 복속해 있다가 불화가 생겨 [[응우옌 왕조]]에 조공하고 복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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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안남 국왕책봉]]
*[[일본 국왕]]
*[[사대교린]]
*[[견당사]]
*[[감합무역]]
 
[[분류:동아시아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