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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설화: 건국설화 출저있습니까.그리고 일본인이 살았다는 근거하고 여러가지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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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연맹의 패망 ===
[[399년]]에 가야의 [[철기군]]은 신라의 주요항구인 울산으로 북상을 시작했고 여기서 상륙해 있던 일본군과 합류했다. 일본군을 그 지휘하에 넣은 가야군은 남천가에서 신라군의 주력을 격파한 뒤 곧바로 서라벌을 공격했고 신라는 국가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신라의 [[내물 마립간]]은 급히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남하해 있던 [[광개토왕]]에게 구원요청을 했고 곧이어 가야와 마찬가지로 철기병이 주축인 5만명의 [[고구려]]군이 서라벌을 기습공격했다. 서라벌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고구려군에 궤멸당해 와해되고 말았고 가야군도 1만 5천 안팎의 자국병력은 유지한 채 [[동래군|종발성]]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고구려와 가야의 철기군은 대등한 능력을 지녔지만 숫적으로 불리했던 가야군은 결국 고구려에 패퇴하고 말았고 이 전쟁으로 가야는 패망하고 말았다. 가야가 패망한 뒤 변한지역은 [[반파국]]의 대가야가 등장하기까지 한동안 미증유의 혼란에 휩싸여야 했다. 가락국으로부터 대규모 난민이 발생되어 [[반파국]]등의 변한 내륙으로 이주하거나 일본열도로의 [[보트피플]]이 유입되어 경남내륙과 일본 큐슈일대에 가야계소국의 건국이 이루어지거나 반파국이 [[대가야]]로 도약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ref>이시기의 가야계 보트피플의 유입이 일본 고대 천황제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ref> 한편 가야가 패망해 맹주지위를 상실한 가락국은 낙동강 수로와 [[고 김해만]]의 배후였던 부산지역을 상실했고 이는 결국 가락국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됬다됐다. 해상무역이 적잖이 중요했던 가락국으로서는 무역로가 끊겨서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 가락국의 멸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