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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한제국은 기원 1세기 초에 외척인 왕망(王莽)이 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워 일시 와해되었으나, 얼마 후에 한제실(漢帝室)의 일족인 유수(劉秀, 光武帝)가 한조(漢朝)를 부활하여 후한(後漢)을 세웠다.후한은 1세기 후반에 재차 서역(西域)에 진출하여 동서 교통로를 확보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세기에 들어와서 환관(宦官)·외척의 세력이 증대하여 중앙의 정치가 문란해지고, 지방에는 호족(豪族)의 토지겸병이 진척되어 농민을 압박하였으며, 북변(北邊)에는 선비(鮮卑)의 침입이 격화되었다. 2세기 후반의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계기로 제국은 분열되었으며, 3세기에 이르러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후한의 멸망 후 약 반세기 동안은 위(魏)·촉(蜀)·오(吳)의 3국에 의한 정립(鼎立) 상태가 계속되었고, 그 후에 진(晉)에 의한 중국의 재통일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으며, 겨우 30여 년 후 중국 내부에 이주한 흉노(匈奴)족에 의하여 수도 장안(長安)이 함락됨으로써 왕실의 일족이 강남(江南)으로 이동하고, 진의 일족도 새로 건강(健康)에 도읍을 정하니, 이것이 동진(東晉)이며 이전의 서진과 구별된다.동진은 그 후 1세기 가량 계속되었으나 그 사이에 화베이 지방에서 5호(五胡) 민족들이 연달아 건국하여 동란의 시대를 연출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중국 역사상의 5호 16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이다.
 
=== 로마 제정 ===
 
==== 로마 제정 ====
{{본문|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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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원 1세기에 유대교로부터 분리, 생성한 그리스도교는 [[사도]](使徒)들에 의하여 로마 제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297년의 마니교 금지에 이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명령했다. 그것은 전통적 다신교에 의해 제국 국민의 정신적 결속을 시도한 것인데, 이미 제국에 뿌리박은 그리스도교에의 결정적 타격은 되지 못하여, 박해정책의 추진자인 [[갈레리우스]] 자신이 311년 조건부 관용령을 내리고 다시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전면적인 관용령인 [[밀라노 칙령]]을 내려 신앙과 교단 결성의 자유를 인정하고, 교도의 복권, 몰수 재산의 반환을 규정하였다.
 
==== 로마 분열 ====
[[테오도시우스 1세|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사후, 395년에 장자 [[아르카디우스]](동로마 제국), 차남 [[호노리우스]](서로마 제국)가 제국을 분할 통치한 이래,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급속화하였다. 로마는 [[알라리크 1세|알라리크]]가 지휘하는 [[서고트인|서고트족]](410)과 [[가이세리크]] 휘하의 [[반달족]](495)에 점령되고, 이 동안 서로마 제국을 지킨 것은 ‘게르만 민족’ 출신의 사람(반달인 스틸리코, 서고트인 리키메르 등)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리키메르가 세 사람의 전제군주(마요리아누스·리비우스세베루스, 안테미우스)를 차례로 죽인 후에 네포스가 일어났으나 [[오레스테스]]에게 폐위당하고, 다음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오레스테스의 아들)는 476년, [[오도아케르]]에게 페위되어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 파르티아 ===
유목민(遊牧民)이었던 파르티아인은 세력이 늘어나 이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훗날 예술, 종교 등의 면에서 이란적인 특색이 짙어졌다. 이와 같은 혼합적 성격이 파르티아 문화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또한 파르티아 시대는 훗날의 사산조 시대에 이란 문화가 개화(開花)하기까지의 서아시아에서의 과도적(過渡的)인 한 시기로 볼 수 있다.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 세력의 후퇴와 함께, 동방 변경에서는 먼저 박트리아의 디오도토스가 분리하였고, 이어 기원전 247년 이란계 유목민 출신의 아르사케스가 독립하여 파르티아 지방을 지배했다. 이것이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왕국(전 247 후 226)의 출발이다. 그는 얼마 후에 전사하고, 아우인 티리다테스가 뒤를 이어 서방에 영토를 확장하여 도읍을 헤가톰필로스에 두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 1세(재위 전 171 전 138?) 시대에 파르티아의 대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는 동으로는 박트리아 왕국, 서로는 셀레우코스 왕조를 쳐서 헤라트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고, 티그리스강 동쪽 연안에 파르티아 후기의 수도 크테시폰을 건설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동방에서는 박트리아 왕국이 멸망하여 대월지(大月氏)로 바뀌었고, 서방에서는 로마의 진출이 현저해졌다. 파르티아에서는 미트리다테스 2세(재위 전 123 전 87?)가 즉위하여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에까지 세력을 뻗쳐서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그가 죽은 후 국내에 분쟁이 빈발하게 되고, 또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로마와의 대립으로 고투를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3년의 카를라에 전쟁에서는 크라수스를 전사하게 하였으며 기원전 36년에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대패(大敗)시켰다. 로마의 제정(帝政)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화평을 희망하여 이후 약 1세기 동안은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가 비교적 평온했다.
 
=== 인도 ===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에 걸쳐 갠지스강(江) 유역은 샤이슈나가 왕조가 지배하는 마가다국(國)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그 후 기원전 4세기 초에 샤이슈나가 왕조가 무너지고 난다 왕조로 바뀌었으나 마가다국의 번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한편 인더스강 유역은 기원전 518년경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다레이오스) 1세에 정복되어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전해진 페르시아 문화는 다시 동쪽의 갠지스강 유역에서 번영하고 있던 인도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린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7년부터 기원전 325년에 걸쳐서 인더스강 유역에 침입하여 그 후 얼마 동안 이 지방은 그리스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갠지스, 인더스의 두 강에 걸친 통일제국을 건설한 것은 마우리아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이다. 그는 마가다국의 지배권을 난다 왕조로부터 빼앗자 즉시 서북 인도의 그리스 세력을 일소하고, 이어 남부 데칸 지방의 정복에 힘을 기울였다.마우리아 왕조는 제3대 아소카왕(王) 시대에 최성기를 맞아서 그 지배는 인도 대륙의 거의 전역에 미쳤다. 마우리아 제국은 중앙 직할령과 속주로 나뉘었고 각 주에는 중앙에서 왕자나 대신이 파견되어 통치를 담당하였다. 통일제국의 출현에 의해서 국내 교통이 원활해졌고, 경제·사회·문화의 각 방면에 있어서 전국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화적 후진 지대였던 남부 인도는 이 시대에 북쪽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문화 발달이 촉진되어, 마우리아 제국 쇠퇴 후에 있어서의 안드라 왕조의 번영을 보게 되었다.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이 왕조도 아소카의 죽음 후 쇠퇴의 길로 향하여, 기원전 187년경 슝가 왕조의 창시자인 푸샤미트라에 의해서 무너지고 인도는 다시 정치적 분열의 시대로 들어갔다.
 
=== 진의 중국 통일 ===
기원전 238년 진왕(秦王)은 즉위 후 10년 만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정치에 임하게 되었다. 진(秦)은 이미 효공(孝公) 이래의 부국강병책이 열매를 맺어, 전국(戰國)의 열강 7개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다. 이 충실한 국력을 배경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동방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적대하는 6국의 정복에 나섰다. 진은 강대한 군대와 교묘한 외교술(外交術)이나, 밀정에 의한 열국의 이간공작(離間工作) 등에 의해서 우선 기원전 230년에는 정면(正面)의 적인 동시에 중원(中原)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韓)을 멸망시켜서 동방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어서 북으로 진격하여 조(趙), 연(燕)을 정복하고, 또한 동쪽의 위(魏), 남쪽의 초(楚)를 넘어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강국 제(齊)를 기원전 221년에 멸망시켜 천하통일의 위업을 완성했다.
 
진왕은 이사(李斯)를 발탁하고 통일국가의 기초를 굳게 다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단행했다. 이사는 법가사상을 신봉하는 정치가였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법가의 정치는 상앙 이래의 진 나라의 전통이요, 이것은 또한 통일국가의 완성에 의해서 타고난 자신(自信)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고, 냉혹하게 천하를 지배하려고 한 진왕의 심정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왕이 이사를 발탁한 것은 신생의 통일국가 통치의 기본방침을 명확히 내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왕(秦王)은 왕의 칭호를 폐지, 황제(皇帝)라 자칭하고, 황제 전용어를 만들어서 군주의 권위를 높였다. 이 제(帝)라는 말은 본래는 하늘의 신으로서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최고신(最高神)을 의미하고 있었다. 또한 황(皇)은 ‘빛나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지상의 왕인 진왕이 왕의 칭호를 고쳐서 황제라는 칭호를 쓴 것은 세계는 물론이요 전우주를 지배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강한 자부의 표명이요, 또한 군주(君主)라는 사람의 성격의 표명이었다. 진왕은 또한 지배자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군주의 사후에 업적에 비추어 호(號)가 추증되는 시(諡)의 제도를 폐지하고, 초대(初代)는 시황제(始皇帝)로 시작하고, 이하 2세도 황제(皇帝), 3세도 황제라 하여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영원히 전해 내려갈 것임을 선언했다. 이리하여 진왕은 초대의 황제가 되고, 사후에 시황제라고 일컫게 되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으로서 종래와 같이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봉지(封地)를 내주어 자치(自治)를 인정하는, 이른바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이것을 지방 행정의 단위로 삼았다. 진(秦)에서는 상앙 이래 현제(縣制)를 시행하고, 또한 새로운 정복지에는 군(郡)을 두어 직할지로 삼고 있었지만, 전국 규모로 획일적 군현제가 시행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와 동시에 관제(官制)를 정비하여 우선 중앙에는 행정, 군사, 감찰의 최고 책임자로서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두고, 그 밑에는 사법(司法)의 정위(廷尉), 국가 재정을 맡는 치속내사(治粟內史), 제실(帝室)의 재정을 맡는 소부(少府), 궁전 경비를 맡는 낭중령(郎中令), 궁문 경비를 맡는 위위(衛尉), 외교를 맡는 전객(典客), 종실관계의 종백(宗伯), 종묘(宗廟)의 태상(太常), 거마(車馬)를 맡는 태복(太僕) 등의 9관(九官)을 배치하여 서무(庶務)를 통할했다.
 
한편, 지방의 군(郡)에서도 중앙을 본따 장관(長官)에는 수(守),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 감찰관으로는 감(監), 현에는 장관으로서 영(令),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가 각각 중앙에서 파견되어 통치에 임했다. 이리하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정연한 행정조직을 만들어, 황제의 명령이 그대로 지방의 말단에까지 이르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이 진 나라의 행정조직은 다음의 한(漢)나라에 계승되어 나중에는 많은 변화가 가해졌지만, 중국에 있어서의 통치의 기본적인 조직으로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랫동안 천하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戰國)의 각국에서는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고, 저마다 독자적인 문자나 계량의 단위, 화폐 등이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운영의 필요성에 의한 군현제의 전국 실시에 따라 각종의 통일이 시행되었다. 문자(文字)는 이사(李斯)가 고안했다고 하는 소전(小篆)으로 통일되고, 도량형의 단위를 일정하게 정하며, 화폐는 포전(布錢)이나 도전(刀錢) 등을 폐지하고 진(秦)의 원형방공(圓形方孔)의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했다.
 
또한 도로망(道路網)의 전국적인 정비를 시행하여 마차의 수레바퀴의 폭까지 동일규격으로 고쳤다. 역시 이 도로망은 치도(馳道)라고 불리면서 시황제의 순행용(巡幸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방과의 연락용 외에 비상시에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키는 군용 도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사상의 통제도 엄격하여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자(儒者)를 생매장하였고, 정치에 유해하다고 인정된 서적을 불태워버렸다. 이것이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대외적으로는 북쪽의 흉노를 치고 춘추 이래의 만리장성을 보수하여 북변의 방비를 강화하고 남쪽은 화남(華南)에서부터 지금의 베트남 북부까지를 영유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빈번한 원정과 장성(長城), 궁전, 능의 수축 등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을 괴롭혔으며, 또한 개혁도 급격했기 때문에 백성의 불만은 차츰 높아졌다. 기원전 210년 순행(巡幸) 도중 황제가 급사하자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亂)을 계기로 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진나라는 통일 후 불과 15년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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