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중복 분류 제거 |
Motoko C. K. (토론 | 기여) |
||
15번째 줄:
== 춘추 시대 말기의 정세 ==
춘추 시대의 말기가 되자 북의 [[진 (희성)|진]](晉), 남의 [[초 (춘추 전국)|초]](楚)가 권세를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중의 하나로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남쪽에 [[오 (춘추)|오]](吳)와 [[월 (춘추 전국)|월]](越)의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발흥하게 된다. 이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나, 춘추 시대의 후반이 되면 우선 오가 역사에 등장한다. 북의 진(晋)은 초(楚)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서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다.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고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하게 했다. 그 결과, 오와 월 사이에서는 사투가 되풀이되었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고 있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된다. 그 결과, 오왕 부차(夫差)는 패하여 자살하고, 오는 멸망한다.
승리를 한 월왕 구천(句踐)은 세력을 북방으로 진출시켜 산둥(山東)이나 허난성(河南省) 남동부의 여러 나라를 그 산하(傘下)에 거두어들이고, 한때 도읍을 낭야(琅邪)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오 역시 왕 부차가 노(魯)와 제(齊)를 무찌르고, [[기원전 482년]]에는 황지(黃池)에 제후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진(晋)과 회맹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 두 나라의 땅은 일찍이 기원전 4000년경에 수도경작(水稻耕作)의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은(殷)으로부터 서주시대에 걸쳐서는 거의 이렇다 할 문화도 없이 잊혀져버린 지역이었다. 춘추의 후반이 되어 갑작스럽게 이 두 나라가 출현하여, 한때는 진이나 초를 능가하는 형세를 나타내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오의 영역을 병합한 월도 역시 얼마 안 가서 쇠망해버렸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북의
또한 [[기원전 453년]]에는 한, 위, 조 등 3씨가 가장 강대해진 지씨(知氏)를 공략하여 사실상 진을 3등분하여 독립하였다. 이와 같이 귀족이 제후를 억누르고 그 나라의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현상은 노(魯)나 제(齊)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춘추 시대 후반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국제적인 외교도 [[기원전 546년]]의 송(宋)의 화평회의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모두 귀족들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다. 한·위·조 등 3씨는 기원전 403년에 주왕(周王)에 의해 제후로서 인정받게 되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53년]] 이래 독립국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춘추 시대를 통하여 유력한 대국으로서 제후를 통제해 온 진이 사실상 멸망한 이 해를 고비로 하여 그 전을 춘추 시대, 그 후를 [[전국 시대]]라고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