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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국경을 접한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로마에게는 강력한 적대자였다. 그러나 로마와의 항쟁으로 국력을 소모하였고, 또 국내에 있어서 제후국의 분립(分立)으로 피폐해 있던 중, 3세기에 들어와서 이란의 페르시스 지방에서 일어난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였다. 중앙아시아에는 기원을 전후해서 쿠샨 왕조가 대통일을 실현하고 서북 이집트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2세기의 카니시카왕 시대가 최성기(最盛期)였으며, 쿠샨 왕조의 발전으로 중앙아시아의 국제 무역은 현저하게 번영, 간다라의 불교문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3세기에 들어와서 서방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세력이 침투함에 이르러 왕국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인도 남부에는 마우리아 왕조의 쇠퇴 후 드라비다계(系)의 여러 국가가 세워졌으나, 그 중에서도 안드라 왕국이 최대 왕국으로서 전후 350년간 존속되었다. 남인도의 여러 국가는 인도양의 해상 무역에 의하여 번영을 누렸으며, 로마제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였다. 그 위에 인도인의 해상 진출이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한제국은 기원 1세기 초에 외척인 [[왕망]](王莽)이 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新)을 세워 일시 와해되었으나, 얼마 후에 한제실(漢帝室)의 일족인 유수(劉秀, 光武帝)가 한조(漢朝)를 부활하여 [[후한]](後漢)을 세웠다.후한은 1세기 후반에 재차 서역(西域)에 진출하여 동서 교통로를 확보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세기에 들어와서 환관(宦官)·외척의 세력이 증대하여 중앙의 정치가 문란해지고, 지방에는 호족(豪族)의 토지겸병이 진척되어 농민을 압박하였으며, 북변(北邊)에는 선비(鮮卑)의 침입이 격화되었다. 2세기 후반의 황건적(黃巾賊)의[[황건적의 난을난]]을 계기로 제국은 분열되었으며, 3세기에 이르러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후한의 멸망 후 약 반세기 동안은 [[ (삼국)|위]](魏)·[[촉한|]](蜀)·[[오 (삼국)|]](吳)의 3국에 의한 정립(鼎立) 상태가 계속되었고, 그 후에 [[서진|]](晉)에 의한 중국의 재통일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으며, 겨우 30여 년 후 중국 내부에 이주한 흉노(匈奴)족에 의하여 수도 장안(長安)이 함락됨으로써 왕실의 일족이 강남(江南)으로 이동하고, 진의 일족도 새로 건강(健康)에 도읍을 정하니, 이것이 [[동진]](東晉)이며 이전의 서진과 구별된다.동진은 그 후 1세기 가량 계속되었으나 그 사이에 [[화베이|화베이 지방에서지방]]에서 5호(五胡) 민족들이 연달아 건국하여 동란의 시대를 연출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중국 역사상의 [[5호 16국시대16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이다.
 
=== 고대 로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