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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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일본 수군은왜군은 1592년 7월경 [[한산도 대첩|한산도]]에서 패배한 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8월 중순경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기무라 시게지]], [[오카모토 에치고]] 등의 부대는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카쓰]]군 주력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군의왜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우도순찰사 김수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시|양산]](梁山),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도주통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순신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도수군절도사(경상우수사) [[원균]] ([[8월 25일]] 합류)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 함대를 편성하여 출진하였다. 이순신은 부산포로 향하던 중 [[서평포 해전|서평포(西平浦)]], [[다대포 해전|다대포(多大浦)]], [[절영도 해전|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일본군 전선 24척을 격파했다.
 
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군은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