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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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카레 전투는 '''로마가 겪은 대패배 중에 하나'''로하나로 기억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전사하고, 그의 머리는 로마군이 보이도록 창에 꽂아지게 되었다. 크라수스 자신도 이 전투 후에 살해당하고, 머리는 파르티아왕 [[오로데스 2세]]에게로 보내졌다. 파르티아군의 보병대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정복하여 왕을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다만 이 승리로 인해 오로데스 2세는 사령관 수레나스에게 의심과 질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얼마안가 수레나스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수레나스의 죽음에 왕이 관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수레나스의 사후, 오로데스 2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의 지휘를 맡았다. 오로데스 2세는 수레나스와는 달리 전투에 뛰어나지 않았고, 또한 수레나스가 채용한 전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후 로마군에 의해 약해진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실패하면서 증명하게 된다.
 
크라수스 휘하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약 10,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돌아와 2년간 시리아를 오로데스 2세의 공격으로부터 지켰다. 그 후 카시우스는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이 승리로 인해 [[키케로]]에게 극찬을 받게 되었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의 중요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