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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 시기에는 연왕에 봉(封)해졌다. 홍무제 사후 조카 [[건문제]]의 제위계승 및 제후 숙청 정책에 반발하여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난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는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을 잇는 운하를 완공시킨 이후 14년만에 도읍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영락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건문제가 영락제의 정변에 의해 축출됐을 때 건문제의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하여 그의 십족가족, 친구, 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847명이 몰살당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041686 의리의 돌쇠] 대전일보 2005.08.23</ref> 영락제는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을 비롯한 십족과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하는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나 첩, 기녀로 보냈다. 이는 '십족을 멸한다' 또는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영락제는 역사상 중국 황제로는 역사상 최초로 다섯 번에 걸친 막북 친정을 통해 몽골 족 등과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로인해 명은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여진족은 위소에 편입시켰으며 누르칸도사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패권 확립, 베트남의 정벌, 티베트의 회유와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 준비,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문물 교류 등의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내정에서는 홍무제의 방침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의 치세로 [[명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