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 류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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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인 예안(禮安)에서 거주하였다.
녹전(祿田) 마곡서원(磨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 『권옹집(倦翁集)』이 있다.
[[류중영]]의 6촌 아우이자 [[류운룡]], [[류성룡]] 형제의 7촌 숙부 즉 재종숙부이다재종숙부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류종개]]의 아버지이다.
■참고문헌 : 宣城誌․안동하회마을(徐守鏞)
 
 
 
 
 
 
* [[류경심]](柳景深, 1516년 ~ 1571년) : 자는 태호(太浩). 호는 귀촌(龜村)이다. 조부는 류자온(柳子溫)이며 아버지는 정5품 정랑을 지낸 류공권이다. 어머니는 영양남씨 남팔준(南八俊)의 딸이다. 류중영, 류중엄과는 사촌지간이며 원주목사 류운룡, 의정부영의정 류성룡 형제의 당숙(5촌)이다. 1537년(중종 3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홍문관정자등을 지냈다. 1546년(명종 1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정미사화 때 파직되었다가 1551년 6월 다시 회인현감에 기용되었다. 1553년 유신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다하여 왕으로부터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받았다. 그 후 광주목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 외직을 계속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1년) 호조참판이 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571년에는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평안도관찰사 임기중 병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장단에서 졸하였다. 조선 선조는 류경심의 부음 소식을 듣고 애도하고 특별히 부의를 내렸다. 저서로는 《귀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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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룡]](柳成龍, 1542년 ~ 1607년) :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류중영]](仲郢)이고,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으며 명나라 구원병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징비록》 등이 있다.
 
* [[류기]](柳綺, 1561~1613) : 자는 여장(汝章). [[류운룡]]의 차남이자 [[류성룡]]의 조카로 관직은 낭천현감에 이르렀다.
학봉 [[김성일]]의 큰형 약봉 [[김극일]]의 사위이며 [[한석봉증유여장서첩]]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류후조]](柳厚祚, 1798년 ~ 1876 ) : 자는 재가(載可), 호는 매산(梅山)·낙파(洛坡)·영매(嶺梅). 류성룡의 8대손이자 류진의 7대손. 돈녕부 도정(都正) 심춘(尋春)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64년(고종 1)에 이조참판,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흥선대원군의 남인계 인사 중용책에 따라 1866년 우의정, 1867년 좌의정, 1872년 판중추부사에 올랐다.